지난 번에 쓴 교회 내 갈등 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2탄'을 써보기로 했다. 관심이 높은 이유가 실제 교회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평화로워야 할 것 같은 교회에 직설적으로 갈등이란 단어를 조합시킨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구질구질한 설명이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교회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듣는 얘기를 모아봐도 그렇고, 법정까지 가는 몇몇 대형교회 사례들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공동체여야 할 교회에서 왜 갈등이 생길까? 사실 간단한 답이 하나 있다. 바로 교회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조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교회가 사회 공동체와의 차별성을 강조해도 교회 안 사람들은 사회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또는 같은 사람들이다. 특별히 우리 사회는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 즉 우리 사회에는 갈등이 많고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쌓여 있다는 얘기다. 이유는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이 갈등에 대응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생활하고 공동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고 부르짖어도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교인들은 그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쌓는다.
그렇다면 교회 내 갈등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애초에 교인들이 사회에서 터득한 상호 비난과 대립의 갈등 대응을 교회에서는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갈등에 취약한 교회의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어렵고 따라서 발전이 더딘 영역 중 하나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가 사회보다 앞서 갈등에 취약한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결정 권한이 소수에 집중돼 있고, 소수가 만든 일방적이고 독점적인 담론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흔히 갈등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점들이 목회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것들을 바꾸는 것은 뭔가 교회의 본 모습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따져보자. 가부장적 문화, 그리고 소수의 독점, 결정, 교회 운영 등은 사실 교회의 정체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신학자는 아니지만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들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만들어지고 강화된 것인데 시대와 교인들의 필요가 변했음에도 교회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일 뿐이다.
그럼 갈등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구조와 문화를 바꾼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정 권한의 소수 집중을 해체하고 다수가 권한을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유지되는 공동체인데 결정 권한이 소수에 집중돼 있으면 모순적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결정이 이뤄지든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를 위해 소수에 의한 결정을 끊임없이 정당화시키고, 설득하며, 강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침해해서 자발적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할뿐만 아니라 교회를 갈등에 취약하게 만든다. 이런 모순적이고 취약한 구조를 바꾸는 결정 권한의 공유는 목회자, 또는 목회자와 장로가 하던 결정 과정에 집사까지 포함시키고, 또는 집사까지 포함시키던 과정에 모든 교인을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모두 알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일이라면 투명하게 드러내고 다 같이 결정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속감을 높여 주고 무엇보다 갈등을 예방하는 길이다. 어렵고 비효율적이라고? 물론 어렵다. 무언가를 바꾸는 것,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항상 어렵고 맘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효율적이란 생각은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다. 결정 절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실행에 초점을 맞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결정을 정당화하고 강요하며 그에 따른 잡음과 갈등에 대응할 때 소비되는 시간, 에너지, 감정 등을 생각한다면 절대 비효율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교회 내에서 크고 작은 잡음과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결정 방식을 바꾸는 것이 비효율을적 운영을 피하는 길이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소통 방식을 바꿔야 한다. 한 쪽이 결정하고 명령하며, 다른 쪽은 듣고 따르기만 하는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대화와 상호 확인이 이뤄지는 쌍방 소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교회는 일방적 소통에 아주 익숙하다. 많은 교인들은 그것을 교회가 지켜야할 원칙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물론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정체성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신앙적 가르침과 지도를 모두와 결정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것은 목회자의 고유한 영역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식과 교회의 운영에 관련된 것은 구분돼야 하고, 그것들에까지 일방적 결정과 명령을 적용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쌍방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을 형식화하고 체계화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소통을 개인의 배려, 용기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건 시도,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과시 등 개인의 선택으로 두지 않고 공식적인 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동체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현안에 대해서는 공동논의 형식을 만들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교인의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모든 교인이 함께 논의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아야 한다. 교회가 크다면 각 부서별로 논의하고 결과를 수렴해 다시 대표들이 만나 논의하는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의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체계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복잡하고 어렵다고? 당연히 그렇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교회에서 생기는 몇 사람의 뒷담화, 불만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잡음, 나아가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예방하는 길이다.
갈등에 취약한 교회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면 갈등이 예방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바람직한 접근이다. 사실 한국인들이 갈등에 취약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일단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관계가 파괴돼 평생 갈등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쿨하게 '이제 화해하자'고 얘기하는 사람도 드물고, 지나간 일을 모두 덮고 '새출발'하는 사람도 드물다.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칠 수 있을만큼 뻔뻔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갈등의 예방이고, 교회 갈등도 예방이 최선이다. 무엇보다 교회 내 갈등을 예방해야 하는 이유는 신앙 공동체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다. 교회 갈등의 최악의 결과는 신앙 공동체의 파괴고 그로 인해 개인이 입는 상처는 신앙 공동체에서 입는 것이기에 거의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갈등에 취약한 구조와 문화를 가진 교회라면, 그래서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는 교회라면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과감한 시도를 해볼만 한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참여적이고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 구조와 문화와 변화가 시도돼야 한다.
지난 번에 쓴 교회 내 갈등 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2탄'을 써보기로 했다. 관심이 높은 이유가 실제 교회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평화로워야 할 것 같은 교회에 직설적으로 갈등이란 단어를 조합시킨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구질구질한 설명이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교회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듣는 얘기를 모아봐도 그렇고, 법정까지 가는 몇몇 대형교회 사례들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공동체여야 할 교회에서 왜 갈등이 생길까? 사실 간단한 답이 하나 있다. 바로 교회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조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교회가 사회 공동체와의 차별성을 강조해도 교회 안 사람들은 사회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또는 같은 사람들이다. 특별히 우리 사회는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 즉 우리 사회에는 갈등이 많고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쌓여 있다는 얘기다. 이유는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이 갈등에 대응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생활하고 공동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고 부르짖어도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교인들은 그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쌓는다.
그렇다면 교회 내 갈등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애초에 교인들이 사회에서 터득한 상호 비난과 대립의 갈등 대응을 교회에서는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갈등에 취약한 교회의 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어렵고 따라서 발전이 더딘 영역 중 하나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가 사회보다 앞서 갈등에 취약한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결정 권한이 소수에 집중돼 있고, 소수가 만든 일방적이고 독점적인 담론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흔히 갈등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점들이 목회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것들을 바꾸는 것은 뭔가 교회의 본 모습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따져보자. 가부장적 문화, 그리고 소수의 독점, 결정, 교회 운영 등은 사실 교회의 정체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신학자는 아니지만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들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만들어지고 강화된 것인데 시대와 교인들의 필요가 변했음에도 교회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일 뿐이다.
그럼 갈등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구조와 문화를 바꾼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정 권한의 소수 집중을 해체하고 다수가 권한을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유지되는 공동체인데 결정 권한이 소수에 집중돼 있으면 모순적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결정이 이뤄지든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를 위해 소수에 의한 결정을 끊임없이 정당화시키고, 설득하며, 강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침해해서 자발적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할뿐만 아니라 교회를 갈등에 취약하게 만든다. 이런 모순적이고 취약한 구조를 바꾸는 결정 권한의 공유는 목회자, 또는 목회자와 장로가 하던 결정 과정에 집사까지 포함시키고, 또는 집사까지 포함시키던 과정에 모든 교인을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모두 알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일이라면 투명하게 드러내고 다 같이 결정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속감을 높여 주고 무엇보다 갈등을 예방하는 길이다. 어렵고 비효율적이라고? 물론 어렵다. 무언가를 바꾸는 것,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항상 어렵고 맘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효율적이란 생각은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다. 결정 절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실행에 초점을 맞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결정을 정당화하고 강요하며 그에 따른 잡음과 갈등에 대응할 때 소비되는 시간, 에너지, 감정 등을 생각한다면 절대 비효율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교회 내에서 크고 작은 잡음과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결정 방식을 바꾸는 것이 비효율을적 운영을 피하는 길이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소통 방식을 바꿔야 한다. 한 쪽이 결정하고 명령하며, 다른 쪽은 듣고 따르기만 하는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대화와 상호 확인이 이뤄지는 쌍방 소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교회는 일방적 소통에 아주 익숙하다. 많은 교인들은 그것을 교회가 지켜야할 원칙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물론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의 정체성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신앙적 가르침과 지도를 모두와 결정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것은 목회자의 고유한 영역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식과 교회의 운영에 관련된 것은 구분돼야 하고, 그것들에까지 일방적 결정과 명령을 적용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쌍방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을 형식화하고 체계화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소통을 개인의 배려, 용기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건 시도,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과시 등 개인의 선택으로 두지 않고 공식적인 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동체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현안에 대해서는 공동논의 형식을 만들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교인의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모든 교인이 함께 논의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아야 한다. 교회가 크다면 각 부서별로 논의하고 결과를 수렴해 다시 대표들이 만나 논의하는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의 참여가 필요한 일이라면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체계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복잡하고 어렵다고? 당연히 그렇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교회에서 생기는 몇 사람의 뒷담화, 불만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잡음, 나아가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예방하는 길이다.
갈등에 취약한 교회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면 갈등이 예방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바람직한 접근이다. 사실 한국인들이 갈등에 취약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일단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관계가 파괴돼 평생 갈등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쿨하게 '이제 화해하자'고 얘기하는 사람도 드물고, 지나간 일을 모두 덮고 '새출발'하는 사람도 드물다.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칠 수 있을만큼 뻔뻔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갈등의 예방이고, 교회 갈등도 예방이 최선이다. 무엇보다 교회 내 갈등을 예방해야 하는 이유는 신앙 공동체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다. 교회 갈등의 최악의 결과는 신앙 공동체의 파괴고 그로 인해 개인이 입는 상처는 신앙 공동체에서 입는 것이기에 거의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갈등에 취약한 구조와 문화를 가진 교회라면, 그래서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는 교회라면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과감한 시도를 해볼만 한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참여적이고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 구조와 문화와 변화가 시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