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스빌딩은 '평화세우기'평화구축으로 번역돼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 아직 이 용어가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 용어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기로 한다.

 

1. 전쟁 후 피스빌딩

 

피스빌딩 개념의 적용 가능성

피스빌딩(peacebuilding) 개념은 1992<평화 의제/An Agenda for Peace>라는 유엔 보고서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기존의 유엔 활동은 국가 및 집단 사이 무장 충돌이나 전쟁을 종식시키는 피스메이킹(peacemaking)과 휴전협정이나 평화조약 준수를 감시하는 피스키핑(peacekeep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접근은 사회 집단 사이의 갈등을 예방하고 무장 충돌의 재발을 막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유엔은 전쟁 후 전반적인 국가 및 사회의 재건, 사회 제도의 수립과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 형성, 나아가 집단 및 개인 사이 관계의 회복과 그에 대한 지원이 동반돼야 전쟁 및 무장 충돌을 예방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바꾸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피스빌딩 개념이다. 이때 유엔이 얘기한 피스빌딩은 전쟁이나 무장갈등을 겪은 사회의 재건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러나 20년 이상이 지난 현재 피스빌딩은 국제기구부터 풀뿌리 단체까지, 그리고 무장갈등에 취약한 사회에서부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회의 변화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개념이자 접근 방식이 됐다. 폭력의 감소, 중단, 제거, 그리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 평화의 정착 및 지속가능한 평화의 성취 등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업과 프로그램이 '피스빌딩' 개념 및 접근에 기초해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피스빌딩 개념과 접근을 한반도 평화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피스빌딩이 생소한 용어지만 피스빌딩 접근을 통해 한반도 평화 문제를 성찰하면서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시도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질적이든 수사적이든 전쟁의 위협에 저당잡혀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성찰해 보는 것은 한국사회와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찰과 접근은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한국전쟁 후 피스빌딩

한국전쟁은 종전을 위한 평화조약이 아닌 휴전협정으로 중단됐다. 그것도 남과 북이 아니라 북한.중국.유엔이 조인한 협정이었다. 그후 남북의 무장 충돌 방지와 휴전협정 준수를 통한 '한반도 평화'는 유엔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됐다. 지금의 유엔 평화유지활동과 같은 맥락이다. 비무장지대로 분리된 남과 북은 큰 군사적 충돌 없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으니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성공한 셈이다. 그렇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것 뿐이었다. 전후 사회 재건은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남한은 미국의 전리품이 돼 버렸다. 피스빌딩 개념을 적용해 분석할만한 사회 및 공동체 재건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는 국제사회에 피스빌딩 개념이나 접근이 없었으니 우리가 운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후 거의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처음의 잘못된 접근과 간과한 것들을 제대로 성찰도 시도도 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피스빌딩 개념과 접근을 통해 볼 때 전후 우리가 저지른 실수는 사회와 공동체의 회복과 변화, 그리고 집단 및 개인의 관계 회복과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증오와 분노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적이었던 북한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당장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남한 내에서 서로 적이 되었던, 그리고 전쟁 후 이념 대결에 의해 새롭게 적이 된 집단 및 개인 사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한 내 이념과 견해가 다른 집단 및 개인 사이의 상호 증오와 대립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이제 '남남갈등'이란 말로 간략하게 표현되고 있다. 가장 큰 실수는 전쟁 재발을 막고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목표가 설정됐다면 당연히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공존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 고민, 계획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적 자체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사회는 북한과의 전쟁 재개를 염두에 두고 군비 경쟁과 대립에 몰두해왔고 국민들은 그것을 지지해왔다. 물론 기본적으로 휴전협정이 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우리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는 적극적 시도를 하지 않았다.

피스빌딩을 적용해 성찰할 때 가장 유감스러운 부분은 우리사회가 여전히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전쟁 가능성 없는 평화 정착과 지속가능한 평화를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휴전협정 후 거의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군사적 긴장, 군비 경쟁, 군사적 대결 등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스빌딩 개념에서 전쟁을 겪은 사회(post-conflict society)의 재건과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목표는 전쟁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 목표에 맞춰 국가 및 사회 재건의 구체적 계획과 실행이 이뤄지는 것에 비춰볼 때 우리의 현실은 무척 개탄스럽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사이에 회담과 교류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역사적인 일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이견은 대부분 정치적, 이념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전쟁 가능성 없는 평화 정착과 지속가능한 평화 성취에 대한 합의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관계를 복원하고 대화와 교류를 재개하면 분명 전쟁 가능성이 획기적으로 낮아질 것이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전쟁 없는 한반도를 상상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비록 전쟁에 대한 구체적 성찰이 없는 허구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이고 남북 문제와 한반도 평화 접근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내부적 저항과 대립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 땅의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2. 아래로부터의 평화

 

이벤트는 끝났다

'번갯물에 콩 볶아 먹는다'는 옛말이 생각날 정도였다. 201811일부터 한 달여 동안 숨가쁜 일정이 계속됐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시사하고, 하루 뒤 우리 통일부 장관이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그후 일사천리로 남북 고위급회담, 북한예술단 파견,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구성 등이 결정됐다. 28일 북한예술단의 강릉 공연을 시작으로 올림픽 개회식 남북선수단 공동 입장과 성화 점화, 북한대표단 방문, 북한예술단 서울공연 등 논의의 결과물인 이벤트가 줄을 이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북한 특사 김여정의 등장이었다. 중간에 예정에 없던 일도 생겼지만 모두 원만하게 해결됐다. 남과 북의 관계개선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11일엔 김여정 특사와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돌아갔고 12일엔 북한 예술단도 돌아갔다. 그렇게 이벤트는 끝났다.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경기와 북한응원단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이벤트는 성공했다. 극우 성향의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남북회담, 선수단 공동입장, 예술단 방문 등을 모두 환영했다. 10년 이상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후 일어난 일이라 신기하기도 감격스럽기도 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로 보낸 김여정과 그녀가 들고 온 친서와 메시지는 향후 남북관계 복원과 핵협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긴박하게 돌아간 남북 회담 및 교류를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 이번의 모든 일은 남북 정상의 결단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그 전까지 우리는 최고조에 달한 한반도의 정치적, 군사적 긴장으로 거의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뉴스 프로그램에 나온 한 시사평론가의 말이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줬다. '지도자가 결정을 하면 이렇게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다. 독재국가인 북한에서야 그렇다쳐도 민주주의 국가인 남한에서도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지금까지의 남북관계는 기복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이뤄졌던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개선은 그후 정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전의 관계는 모두 무너졌고 그에 더해 꽁꽁 얼어붙었다.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 대중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고,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적 공존을 원하는 대중의 기대와 요구는 깡그리 무시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한반도는 최악의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고 상호 압박, 무력 시위, 그리고 말 공격이 계속됐다. 이것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한반도 상황을 피스빌딩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원칙적으로 평화를 위한 접근으로 보기 힘들다. 피스빌딩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 다시 말해 상향식(bottom-up) 접근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적인 것이다. 피스빌딩 이론은 현장 적용과 성찰을 통해 발전해왔고, 그것을 통해 증명되고 정리된 것이 바로 상향식 접근이다. 평화는 결정권을 가진 몇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의 의지와 행동으로 가능하지 않고 공동체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의견을 모으고 행동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크고작은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통해 증명됐다. 그러므로 상향식 접근은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평화가 필요한 곳에서 불가피하고 실질적인 접근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접근은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접근, 다시 말해 하향식(top-down) 접근이었다. 결정권자, 특히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과 의지에 따라 정책과 실행 원칙을 만들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도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대중과의 교감과 소통에 매우 소홀하고 미흡했다. 때문에 '남남갈등'이란 신조어가 생겼고 그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화돼 지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피스빌딩을 한반도 평화에 적용한다면, 다시 말해 상향식 접근을 적용한다면 어떤 식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을 논하기 전에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상향식 접근이 우리의 상황에서 필요한가?'이다. 남북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대중이 끼어드는 것을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구성 과정을 보자. 모든 사람들이 지켜봤듯이 아주 갑자기 정부 주도의 일방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당사자인 선수들과 충분한 소통도 없었다. 정부는 사안의 중대성과 절박한 상황을 내세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그것은 기존의 모든 정부가 해온 하향식 접근과 전혀 다르지 않았고 많은 시민들이 그런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남북관계 개선이나 한반도 평화를 원치 않거나 단일팀 자체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민들은 일방적 하향식 접근과 결정의 부과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모든 사람이 하향식 접근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성취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하향식 접근을 축소시키고 대중의 견해를 수렴하고 점차 참여를 높이는 상향식 접근이 가능할까? 여기에는 두 방향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그동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겼던 하향식 접근에 사회 모든 층위의 요구와 필요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 일방적 하향식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노력이다. 다른 하나는 결정권자들의 하향식 접근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의사 표명과 행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박, 감시, 참여 요구, 독려, 격려 등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지금까지 이 두 방향의 노력이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복귀하는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특별히 지금의 변화된 상황에서조차 상향식 접근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된다 해도 정권이 바뀌면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는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다.

2018년 일련의 이벤트로 잠깐 햇빛이 스치고 간 후 무엇이 뒤따를지에 대한 막연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상향식 접근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그 결과 여전히 하향식 접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대중은 안개 속에서 계속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적 도전에 직면해 우리 모두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남과 북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어울리면서 느꼈던 행복함과 안전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하향식 접근에 머물러 있는 정부는 물론 그런 정부를 비판해야 하는 시민들도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당시의 따뜻함을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평화 정착을 위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3. 한국전쟁, 선택된 트라우마

 

멈춰버린 시계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앞에는 '평화의 시계탑'이란 조각상이 있다. 무기더미 위의 두 소녀가 각각 두 개의 시계를 들고 안고 있는 조각이다. 전쟁기념관 입구 게시판과 홈피에서 찾은 설명에 의하면 위쪽에 있는 남쪽 소녀의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가리키고, '밝고 힘찬 미래'를 향해 계속 움직이는 시계다. 아래쪽에 있는 북쪽 소녀의 시계는 6.25 전쟁 시작과 함께 멈춰버린 시간을 상징한다. 통일이 되는 그날에는 아래쪽 시계를 두 소녀 사이에 설치해 남북이 하나됨을 표시할 거란다.

조각상은 통일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심지어 '저주'까지 내포하고 있다. 남한은 계속 발전하지만 북한은 6.25에서 멈춰버린, 아니 그랬으면 하는 사회로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통일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은 남북이 하나됨을 말하지만 실은 발전한 남쪽이 뒤쳐진 북쪽을 흡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전쟁기념관의 존재 자체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의 지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런데 진짜 멈춰버린 시계는 우리 사회 안에 있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고, 시시때때로 되살려진다. 정전협정 이후 65년 동안 군비경쟁과 무력대결에 그렇게 몰두했던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 북한과 정치적, 군사적 대결을 계속했던 것도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증오와 불신 때문이다. 태극기 집회에 나오는 노인들이나 북한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보수 우익 기독교인들의 증오와 적대감 또한 한국전쟁에 뿌리내리고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이 아니라 국가안보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그들의 죽음은 애국심의 테두리 안에서 포장되고 기억된다. 한국전쟁은 매일 되살려지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멈춰진 시계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다.

 

갈등 후 사회(post-conflict society)의 피스빌딩

피스빌딩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내용 중 하나는 (무력)갈등 후 사회의 회복이다. 거기에는 사회 인프라의 재건부터 정의의 실현, 관계의 회복, 묵은 갈등의 해결과 새로운 갈등의 예방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 하향식 정책 결정과 실행은 물론 상향식 활동과 역량형성 교육도 포함된다. 이런 복잡한 내용과 활동이 포함되는 이유는 증오와 반목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거의 충돌과 폭력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다. 나아가 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과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접근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것이 바로 과거다. 사람들은 미래를 향해 가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항상 과거를 보고 있다. 모든 문제가 과거에서 비롯됐고 과거를 다뤄야 결국 현재와 미래도 다룰 수 있다.

피스빌딩 이론의 대가인 존 폴 레더라크는 <도덕적 상상력/The Moral Imagination>이란 책에서 우리 앞에 놓인 과거중에는 기억된 역사(remembered history)’가 있음을 언급한다. 이것은 집단의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역사로 '선택된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자기 집단의 정체성 확인을 위해 적대적 집단에 의해 공격받고 상처받은 특정 기억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강화해 트라우마화한 역사다. 이런 선택된 트라우마는 "집단 간의 방어, 선제 폭력, 심지어 복수에 대한 정당성까지도 부여한다"고 언급한다. 기억된 역사는 적대적 상대와 새로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새롭게 기억되고 계속 재생된다. 한국전쟁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트라우마로 선택하고 끊임없이 생생한 집단적 기억으로 재형성해왔다. 거기에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반목이 있고 그것에 기초해 북한에 대한 복수와 공격의 정당성이 만들어진다. 전쟁 자체의 폭력성, 비윤리성, 반인도주의 등을 성찰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해 반성하고 애도하는 접근은 없다. 전쟁으로 인해 겪은 수많은 개인 및 마을공동체 삶의 파괴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북한과의 적대관계의 지속을 위해 선택된 트라우마고 그 기초 위에서 전쟁기념관도 만들어졌다. 한국전쟁을 한반도 안에서 수많은 희생자와 고통을 낳은 아픈 역사가 아닌 선택된 트라우마로 지속시키는 한 한국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고 한반도평화를 위한 교훈으로 삼기는 힘들다. 그동안 미뤄뒀던 피스빌딩 노력도 시작할 수 없다.

 

4. 역량형성을 위한 준비와 훈련

 

평화를 위한 시간의 축

2018년에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북미 정상회담도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굵직한 정상회담이 있었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까지 언급됐다. 모든 변화와 의제는 정치권, 정확히는 정부의 주도로 이뤄졌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오랜 세월 다양한 시민단체와 학계 등 비정치권에서 축적된 주장과 담론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쨌든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중은 무엇을 했는가? 대중은 정부에 지지를 표하고 그것을 주간 여론조사에 반영시키는 것 외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 먹는" 것만 하면 됐을까? 몇 달 전까지 계속되던 비상상황에서 벗어난 것에 불과했고 남북, 그리고 북미가 핵무기 폐기와 평화체제를 위한 회담을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평화를 위한 토대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동계올림픽 전후의 해빙 무드는 엄격하게는 겨울, 그러니까 전쟁의 위기를 피하는 상황일 뿐이었다.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의 피스빌딩을 위한 시간의 축은 이런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접근이다. 그가 성찰한 네 단계의 시간은 눈 앞의 것부터 차례로 위기 개입(Crisis Intervention), 준비와 훈련(Preparation and Training), 사회변화 디자인(Design of Social Change),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Desired Future)로 구성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눈 앞의 급박한 상황에 대응하는 위기 개입 단계에 있다. 물론 첫 단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비관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자 시작의 지점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량형성을 위한 준비와 훈련

그렇다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바람직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일까? 위의 시간의 축에 따르면 다음 단계, 곧 준비와 훈련이다. 이것은 비슷한 위기가 닥쳤을 때 뒤로 후퇴하지 않고, 나아가 이전보다 잘 대응하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동시에 다음의 다른 두 단계, 즉 사회변화 디자인과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만드는 노력을 말한다. 남북문제 및 한반도 평화 현안에 잘 대응하기 위한 역량에는 정부와 정치권의 역량도 포함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대중의 역량이다. 그런데 우리사회 대중의 역량은 아주 낮은 수준이다. 남북문제가 우리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과 상처 중 하나는 일부 개인과 집단의 주도 및 통제로 이뤄진 이념 논쟁과 대결인데 그 영향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것은 남북문제를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는 대중의 역량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우리사회는 체계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을 만드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중은 각개 약진의 형태로, 그리고 주관적 경험과 학습으로 각자 조금씩 역량을 형성해 왔다.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단체들조차 대중의 역량 형성보다는 캠페인과 행사에 더 초점을 맞춘 활동을 해왔다. 대부분이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다음의 위기에 더 나은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중의 역량이 형성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의 진보성향 정부 이후 남북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핵무기 개발과 전쟁의 위기를 반복했던 것, 그리고 그 와중에 다수의 대중 또한 치밀한 상황의 분석과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고민보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에만 불타 있었던 것을 봐도 그렇다. 선거 때마다 이념 논쟁이 불거지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면서 대중이 정부와 정치권에 휘둘리는 것을 봐도 그렇다. 지금의 상황은 이전 정부의 상황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수의 대중이 정권과 정치권의 영향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한반도가 해빙기를 맞고 있을 때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활동해온 많은 시민단체, 종교단체, 학계 등은 정부 주도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분석과 지지에 안주했다. 사회 변화와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대중이 준비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얼음이 다 녹고 정말 봄이 도래할 수 있도록, 한 번의 비바람으로 하루아침에 꽃이 다 떨어져 버리지 않도록 대중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 나서지도 않았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목소리를 내고, 각자의 생각과 분석을 얘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북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을 때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함께 만들어갈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했음에도 말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중의 역량을 만드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권은 바뀌고 정치는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데 그런 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와 힘은 결국 대중, 다시 말해 시민의 역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 핵심 주체 또한 바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5. 폭력사회에서 평화사회로

 

전쟁 준비와 폭력문화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전쟁의 가능성 또한 현저히 낮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분간 그랬다는 얘기고 남북관계가 경색된 이후에는 다시 안개 속 상황이 됐다. 한반도는 휴전상태고 이론상 전쟁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북한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한미 연합훈련은 '폐지'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중단' 내지 연기가 이뤄지는 정도다. 20189월의 남북군사합의 이후 군사적 긴장은 특별히 높아지지 않았고 별다른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반도 상황이 언제든 예전의 무력 대결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준비하는 사회다.

엘리스 볼딩(Elise Boulding)은 폭력문화와 관련해 공격의 사회화(Socilization for Aggression)을 지적한다. 전쟁을 겪었거나 전쟁에 참여했던 사회에 존재하는 전쟁 준비와 무력 충돌의 승인이 다방면에서 시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시민의 공격성이 형성 내지 강화되고 그것이 정치, 스포츠, 언론, 시민의 언어는 물론이고 사회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얘기한다. 전쟁을 준비하는 사회에서 폭력문화가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모든 영역에 스며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폭력문화의 피해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 전체가 입게 된다. 비록 개인이 그런 피해를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19세기 말부터 계속 전쟁 내지 무력 충돌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고 그런 역사는 우리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나아가 평화롭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롭지 않은 삶에 대해 거의 성찰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아마도 평화 경험의 부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전쟁이나 무력 충돌의 위험이 없는 상태, 그리고 전쟁 준비에 몰두하지 않는 우리사회를 경험해본 사람은 단언컨데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폭력문화에 길들여진 탓에 별로 문제의식 없이 살아온 것이다.

 

평화문화와 평화사회

한반도에서 현재 우리가 직면한 단계는 싸움을 중단하는 피스메이킹(peacemaking), 다시 말해 평화만들기다. 한국전쟁을 휴전협정으로 중단했을 때 우리는 이미 피스메이킹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후 피스키핑(peacekeeping), 즉 평화유지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의 무력 경쟁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됐고, 그 결과 남한은 최첨단무기로 무장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해 군사적 긴장과 대결 수준을 최고점으로 끌어올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피스빌딩은 피스메이킹과 피스키핑을 거쳐 평화의 완전한 정착까지를 포괄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재 피스빌딩의 첫 단계에 있고 갈 길은 아직 너무 멀다.

평화의 정착으로 가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3국이 각자의 필요 때문에 대화를 아예 포기하지는 않고 있지만 모두 중무장을 한 상태고 전쟁 준비 또한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문화와 작별하고 평화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공격의 사회화를 제거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의 평화롭게 살 권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정부가 아니라 대중에 의해, 다른 말로 하향식(top-down)이 아니라 상향식(bottom-up) 방식에 의해 이뤄질 때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회담과 같은 정치적 과정은 정부가 주도하겠지만 평화 정착을 목표로 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이행하는 데에는 국민의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의 지지와 참여는 평화를 삶의 가치와 태도로 삼고 행동으로 이어가는 평화문화의 확산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삶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그리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결단(예를 들어 전쟁 연습의 완전 중단과 군축 등)이 필요할 때 정말 평화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너무 이상적이라거나, 현실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곤 한다. 그런데 평화사회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평화는 성취될 수 없다. 개인의 평화 또한 성취될 수 없다. 자주 잊지만 우리가 지난 70년 동안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군사 대결을 조장하는 사회에 살면서 직접 경험한 것이다. 많은 책임을 정부에 돌리지만 사실 정부가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폭력사회를 만들게 힘을 실어준 것은 지지와 승인을 한, 또는 침묵과 묵인을 한 우리였다.

 

6. 중간자의 역할

 

평화를 위한 중간자

싸움을 끝내고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별히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불신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상호 신뢰와 협력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직접 접촉, 대화, 협상이 난항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폭력의 중단과 평화 정착까지의 포괄적 과정을 포함하는 피스빌딩과 싸움의 종식과 관계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갈등해결에서는 외부 제삼자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아담 컬은 이를 위해 적극적 조정(active media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양측의 만남과 대화를 촉진시키는 단선적인 조정자(mediator)의 역할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이끄는 적극적 조력자의 역할을 말한다. 실제 그는 나이지리아 내전 종식을 위해 그런 역할을 했다. 그의 역할 수행에서 인상적인 면은 한쪽의 메시지를 다른 쪽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각 당사자와의 깊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편견, 오해, 적대감, 대결 심리 등을 완화시키고 관계, 상호 이익, 그리고 다수의 안전 문제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었다. 한편 존 폴 레더락은 아담 컬이 얘기한 적극적 조정자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고 구체화시켜 '중간자(intermediary)'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통해 각 상황과 단계에 적합한 다양한 역할을 제안했다. 거기에는 만남주선자, 화해중재자, 정보제공자, 진행자, 모니터 등등의 역할이 있다.

아담 컬이 제안하는 적극적 조정자의 역할은 북미대화 또는 관계에서 우리 정부에게 주어진 역할과 비슷하다. 아담 컬은 특별히 공식적인 문서를 전달하는 것보다 한쪽의 말에서 맥락과 진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른 쪽에 전달하면서 편견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모두를 위한 결정을 하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한 조정자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북.미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강조했지만 북한은 그것이 미국에 기운 조정자 역할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여전히 적대관계인 북한보다 동맹인 미국에 기운 역할이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북한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조정자 내지 중간자 역할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 문제가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급하면서도 동시에 장기적인 문제기 때문이다.

 

대중을 위한 중간자는?

우리사회 대중 사이 단절과 대립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중간자 역할도 필요하다. 소위 '남남갈등'이라고 하는 사회적 갈등과 단절은 지난 20년 동안 이념 및 정치 대립과 함께 굳어졌고 중요한 남북관계 및 한반도평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향후 한반도평화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고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남남갈등과 대중 사이 대립과 단절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정보의 부족에서 비롯된 면이 강하다. '남남갈등'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을 두고 만들어졌고 왜곡된 '퍼주기' 담론과 북한에 대한 이념적 거부 및 증오와 관련해 강화됐다. 사실과 데이터가 아니라 그것을 이념에 따라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굳어졌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그런 대립과 단절의 상황 및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대중은 남북문제 및 한반도평화와 관련된 정보와 데이터가 없어서 그때 그때 정치 및 사회 상황과 보도를 보면서 피상적으로 판단하거나 눈앞의 단편적 이익을 쫓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특정 정치 사회 집단의 의도에 쉽게 노출되고 중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개선 및 회복, 그리고 한반도평화를 위해서는 대중 사이 단절을 극복하고 남북문제와 한반도평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상반된 견해를 나누고, 왜곡된 정보를 수정하고, 스스로 현재의 상황, 당면한 문제, 공동의 미래 등을 토론할 수 있도록 만남과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을 돕는 중간자 역할이 필요하다. 특별히 존 폴 레더락이 언급한 내용 중 사실확인, 진행, 역량강화 등의 역할을 할 중간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는 이 역할을 하고 있는 주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정부도, 시민단체도, 풀뿌리 영역도, 그리고 언론도 모두 마찬가지다. 각자 자기 목소리만 내고 그것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평화는 모두의 노력과 지지 없이 이뤄질 수 없고 그 핵심 역량은 대중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니 대중의 단절과 대립 문제를 다룰 중간자 역할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 중 하나다.

 

7. 힘의 불균형 문제

 

힘의 관계와 대화

피스빌딩 과정에서 항상 마주치는 것은 갈등과 대립이다. 이것을 끝내는 과정에서 폭력을 줄이고, 대화 기회를 만들며, 평화 회복과 지속의 방향에 맞춰 협상과 합의를 하는 것이 피스빌딩의 핵심이다. 말은 쉽지만 아주 어렵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도 남북 대립과 갈등이 계속됐던 것이다. 한반도가 한국전쟁 때부터 이런 피스빌딩 과정을 거쳤다면 지금과는 다른 현실이 됐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서의 피스빌딩을 도와주는 외부자도 없었고, 더군다나 내부에서는 여전히 대립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긴 세월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갈등과 대립을 끝내기 위한 대화와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이다. 힘의 불균형이 심하면 상대적으로 강한 쪽이 대화보다 힘을 통한 해결을 원한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해야 향후에도 상대를 찍소리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에 목마르고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는 쪽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약한 쪽이다. 계속 싸우려면 시간, 에너지, 자원이 소비되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여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약한 쪽은 그래서 상대와 마주앉기 위해 상대가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자기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모든 개인, 집단, 사회 갈등에서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런 힘의 관계는 북.미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을 위협하고 결국 대화자리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힘의 불균형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은 원초적인 힘의 불균형이 대화와 협상에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중간자의 역할

2019년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대화와 협상의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 미국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언제든 또 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트럼프에게 친서도 보냈다. 이것은 김정은이 배포가 크고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트럼프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년사에서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북한의 인내심을 오판하고 제재와 압박만 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토를 달았다. 그러나 이 역시 힘이 약하기 때문에 붙인 사족에 가깝다. 상대가 보지 못하는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굳이 알려주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미 대화와 협상이 교착상태에 이른 것은 힘의 불균형 때문이다. 북한은 핵무기로 미국을 위협했지만 경제 발전과 국제사회 진입으로 방향을 틀었고 사실 더이상 내밀 카드도 없었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한때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찔끔 눈을 감았던 미국은 이런 북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강자의 여유를 보이며 약자의 속을 태웠던 것이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제재로 북한의 손발을 거의 묶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쥐도 계속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이 미국과 대화와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면 북한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즉 무력 도발 카드를 다시 꺼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힘의 불균형을 완화할 진정성 있고 능력 있는 중간자다. 물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전 세계에서 남한 밖에 없다. 남한의 이익이 같이 걸려 있기 때문이고, 아직은 북한과 미국 모두가 그 역할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약자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북한을 가자미 눈으로 의심을 품은 채 보고 있다. 힘의 불균형을 완화시키려면 특별히 상대적 약자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힘을 키우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중립적' 역할은 멋져 보이지만 사실상 공정하지 않다. 성공적인 대화와 협상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상대적으로 약한 쪽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미관계나 국제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큰 부담이다.

북미 사이 힘의 불균형을 완화시키기 위해 남한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지만 미국의 눈치도 봐야 하고 북한과의 관계도 신경써야 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해야 하는 일이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남한은 북한과 이익을 공유하는 일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북한의 불이익이 결국 남한의 불이익이 되고 남북이 운명공동체가 되는 상황까지 가야 한다. 북한이 남한과의 이익 공유와 운명공동체를 지렛대로 힘을 키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한의 불이익이 결국 미국과 국제사회의 불이익이 되는 상황이 돼야 한다. 그래야 북.미 관계에서 약자인 북한이 미국과 제대로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있다. 쉽지 않고 전략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반도 평화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 이 글은 평화갈등 이야기피스빌딩과 한반도평화주제로 2018년에서 2019년 초까지 쓴 시리즈 글을 수정해 정리한 것입니다.

 

Posted by 평화갈등연구소 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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