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갈등과 집단 정체성

70년을 넘은 남북갈등은 오래 진행된 다루기 힘든 갈등(protracted and intractable conflict)이다. 이미 오래 전에 고착화됐고 한반도를 정의하는 것 중 하나가 된지도 오래다. 동시에 남북갈등은 우리의 집단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우리의 집단 정체성과 존재 의미는 북한의 존재와 북한과의 관계, 즉 갈등관계를 통해 꾸준히 규정돼 왔다. 남북갈등이 무력 충돌로 폭발한 한국전쟁은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는 집단 정체성 강화로 나타났고, 그후 계속된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대립과 간헐적 충돌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사명으로 삼은 집단 정체성을 만들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대화와 그후의 단절, 2018년 남북대화와 역시 그후의 단절은 조심스럽게 통일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 북한체제로의 통일을 막기 위한 체제 우월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진보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집단 정체성을 만들었다. 이런 집단 정체성 규정과 강화는 남북갈등에서 담론과 주장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대화와 합의를 통한 남북갈등의 공동 해결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에 맞춘 변화와 통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갈등은 보통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만든다.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대립하는 상대가 등장하면 자기 주장의 합리화를 꾀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규정이 이뤄진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규정은 곧 상대 정체성의 확인과 규정, 그리고 차별성을 통한 자기 정당화로 연결된다. 갈등이 진전되고 악화되면 차별성 강조는 상대 정체성의 부정으로 변한다. 남북갈등에서 우리의 집단 정체성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정체성은 불변의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자각은 갈등의 진행 경로와 상대에 대한 이해에 따라 유연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집단 정체성, 특히 북한이라는 갈등 상대를 염두에 둔 정체성은 남북갈등의 근본적, 점진적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갈등의 완화와 일시적 중단, 그리고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북한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은 큰 변화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의 남북관계 개선, 그리고 2018년의 남북대화 경험은 남북관계가 언제 다시 대립과 위기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불신, 그리고 남북갈등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만들었다. 그 결과 남북갈등 안에서의 집단 정체성도 변하지 않았다. 

 

정체성 재확인, 재정의의 필요

파괴적인 남북갈등을 완화하고 건설적인 갈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현재와 미래의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이견을 대화를 통해 대응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집단 정체성에 대한 재확인과 재정의가 필요하다. 70년의 남북갈등 속에서 북한에 대한 불신과 감정에 뿌리내린 우리의 집단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두 가지의 변화가 오래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다양한 하위집단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갈등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북한에 대한 우월성과 차별성이 아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자기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안전, 자유, 행복, 그리고 평화로운 삶의 보장을 저해하는 장애물 중 하나로 남북갈등을 이해한다. 또 자기 삶을 위해 필요하다면 다뤄야 하는 문제 중 하나로 남북갈등과 북한을 이해한다. 이들의 선택은 파괴적, 적대적 갈등 대응이 아닌 자기 안전과 이익을 위한 대응이고 남북의 상호 안전과 이익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다.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 자유와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청소년부터 30대까지를 포함하는 이 세대는 남북갈등과 관련지어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고 남북갈등에 관심도 없다. 이들에게 남북갈등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자기 문제에 끼치는 영향을 따져서 그 중요성과 해결 필요성을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와 한반도 평화를 좌우하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 내지 몰이해로 비쳐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북갈등에 토대를 둔 집단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그리고 유연한 대응의 잠재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하위집단 정체성이 형성돼 있다는 것은 남북갈등의 해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내부 갈등을 만들고 사회적 대응이 부족할 경우 심각한 사회 갈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오래되면 보통 내부의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외부의 갈등에 대응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힘든 일이 되곤 한다. 우리 사회도 이미 그런 경험을 하고 있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부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나타나는 하위집단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대응이 필요하다. 나아가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남북갈등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고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갈등전환 이론의 대가인 존 폴 레더락은 "정체성은 역동적이고 특별히 갈등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정의되고 재정의되며,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계를 통해 이해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환적 과정에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집단과의 관계에서 긍정적 의식을 가지고 정체성의 문제를 언급하고 분명히하도록 독려할 공간과 과정을 만들지"가 도전이라고 말한다. 이건 우리에게도 도전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을 경계하고 적대시하는(해야 하는) 집단 정체성이(북한을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건 남북대화를 지지하는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정당성과 힘을 독점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의 이익과 안전에 초점을 맞춰 북한을 보는 하위집단들의 정체성은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주목할 필요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다양한 정체성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공식화하고 인정할지, 그리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얘기하고 토론하는 공간과 과정을 어떻게 만들지가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다. 남북갈등의 대응과 해결을 위해서는 세대와 가치관에 따라 다양해진 하위집단들의 정체성까지 포함해 우리의 집단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하고, 동시에 새로운 집단 정체성을 형성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는 70년을 넘은 남북갈등은 상투적인 대응과 대립을 거듭하며 앞으로 20년, 50년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Posted by 평화갈등연구소 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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