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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과 한국문화

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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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과 조정자의 역할

조정(mediation)은 갈등(conflict)을 해결(resolution)하는 방식 중 하나다. 갈등은 삶의 필요(need)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익(interest)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립하는 입장(position)을 가지게 된 상호의존적인 당사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조정은 그런 당사자들이 대화를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갈등을 해결하게 하는 과정이다. 조정이 필요한 이유는 당사자들이 직접 대화(dialogue)와 합의(agreement)를 통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상황과 역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제삼자인 조정자(mediator)는 당사자들이 그런 부족한 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조정을 성립시키는 기본적 조건은 대립하는 두 명 이상의 당사자들, 한 명 이상의 조정자, 그리고 당사자들의 대화다. 합의는 흔히 조정의 성공 여부를 재는 잣대로 여겨지지만 조정의 결과지 조정을 성립시키는 기본 조건은 아니다. 사실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끝나는 조정도 많다.

 

그렇다면 갈등에 직면한 당사자들은 왜 자발적으로 조정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일까? 대부분의 조정과 그 결과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조정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제삼자 개입 방식과 구분되는 조정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와 합의다. 재판이나 중재(arbitration)에서처럼 당사자들이 대리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답답함을 견디고, 제삼자의 판단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즉 생각과 원하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싫으면 합의하지 않아도 된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조정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정은 자신의 갈등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 싶은 당사자들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기제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ADR이 강조하는 것처럼 재판보다 시간과 경비가 덜 소비되고 당사자들이 직접 합의를 하기 때문에 합의의 질과 실행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다자가 관계된 갈등 조정의 경우 수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그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막대하며, 경비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간과 경비의 절약은 조정의 절대적 장점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다른 기제들과 구별되는 조정의 특징이자 가장 큰 장점은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와 합의인 것이다. 당사자들은 전체 과정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말과 결정이 존중되기 때문에 조정을 선택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조정의 가장 큰 역할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조정은 당사자들이 잘 대화하고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필요한 환경과 절차를 만들고 보장한다.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 어려움, 불안, 기대, 필요를 확인하고, 갈등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공유하며, 현재와 미래의 삶의 필요를 상호 인정할 수 있도록 안전한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만들고, 모든 절차적, 기술적 지원을 한다.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조정은 파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갈등을 중단시키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갈등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 주변의 개인과 사회의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것은 조정이 갖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지만 당사자들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당사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역할보다 우선되지는 않는다.

 

조정자의 역할은 당사자들이 대화와 합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조정 과정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정 전 갈등분석, 당사자 면담, 조정 참여 설득 등은 물론 조정 과정에서의 당사자 직접 대화 진행, 당사자들의 공동 대안 개발 및 합의 도출 지원, 합의 실행 모니터링 등 광범위한 임무가 포함된다. 때문에 조정의 핵심이 조정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 조정에 대한 많은 책들이 당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조정자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기술을 갖춰야 하는지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책들은 최종 합의 도출 여부가 조정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조정자는 철저히 당사자들을 지원해 조정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할 뿐이고 조정의 중심에 서는 것은 갈등 당사자다. 조정자의 능력이 조정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합의 도출 여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조정자를 중심에 놓으면 당사자 대화와 합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조정이 왜곡될 수 있다.

 

조정과 당사자 대화 및 합의의 질은 조정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잘 초점을 맞추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정 절차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조정자가 어떻게 당사자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다른 당사자의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안전하고 효율적인 절차와 환경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조정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조정과 당사자를 자신이 생각하는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즉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문화, 그리고 이론의 틀 안에서만 조정을 진행하고 당사자가 거기에 맞추도록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당사자들의 세계관, 가치관, 문화, 논리적 이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조정의 기반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특히 당사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당사자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이해에 근거해 갈등을 설명하고 자신의 입장, 이익, 필요는 물론 그것과 관련된 어려움, 불편함, 불안을 설명할 수 있도록 적극 독려하는 것이 조정의 왜곡을 막고 당사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갈등이 특정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그런 당사자들에 의해 갈등이 이해되고 설명되며, 갈등의 전개 방식 또한 당사자의 문화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가진 문화를 고려하는 것은 조정 및 조정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자 절대 간과될 수 없는 일이다.


 조정과 문화

갈등은 흔히 문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엄밀히 따지면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는 갈등은 없다. 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당사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갈등에 따라 문화적 영향을 받는 수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업상의 거래나 특정 사안에만 집중된 갈등의 경우 문화적 영향은 아주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문화는 갈등 발생의 원인이 되고, 전개 방식을 결정하며, 해결의 열쇠가 되곤 한다. 갈등의 당사자는 흔히 문화적 맥락에서 갈등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상대의 대응을 판단한다. 이런 연유로 갈등과 갈등해결(conflict resolution)에 대한 연구는 갈등과 문화의 관계에 주목하고, 갈등해결 과정에서 당사자 문화를 노출시키며, 갈등이 내포한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을 당연한 접근으로 여긴다.

 

학문 분야, 그리고 사회적 실천으로써 갈등해결이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결과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갈등해결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서구사회에서 이론화, 체계화됐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서구사회에서 조정을 포함한 갈등해결 과정을 진행할 때 불가피하게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당사자들을 직면하게 됐고 그 결과 당연하게 문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갈등해결이 서구사회에서 이론화, 체계화됐기 때문에 당연히 주류 백인 문화의 요소만 고집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부분이다. 여기에 더해 갈등해결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회의 전통적 갈등 대응 방식에 주목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비서구사회의 문화적 이해, 시각, 접근까지 포함하게 됐다. 이런 연유로 갈등해결은 다양한 사회에서의 문화적 해석을 존중하고 문화를 고려한 실행 모델 개발을 독려한다. 문화적 접근은 갈등해결의 이론 및 실천에서 이미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됐다. 물론 백인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문화적 접근이 표면적인 것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를 거부 또는 무시하는 접근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원주민 집단 대표들이 참여하는 조정에서는 시작할 때 원주민들의 의식을 포함시키고 역사를 공유하며, 그들의 스토리텔링 방식과 자연 인식을 인정하는 등의 문화적 접근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갈등해결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 조정에서 문화적 맥락 및 영향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은 갈등해결이 사회적 기제 중 하나로 제법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사회, 그러니까 주로 북미, 서유럽, 오세아니아 같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접근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이론화, 체계화된 갈등해결을 새로운 사회 기제로 받아들인 비서구사회에서 문화적 접근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몇 년 전 필자는 공동체조정(community mediation) 운영자들과 조정자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한 달 반을 네팔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네팔은 해외단체들의 지원으로 공동체조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공동체의 자율적 문제해결을 독려하고, 나아가 사법적, 행정적 서비스 공백을 메우는데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네팔의 문화적 특징을 반영한 교육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교육 훈련과 매뉴얼은 서구사회에서 원형 그대로 수입된 것이었다. 아직은 서구사회에서 정형화된 기제를 수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새로운 기제의 확산에만 주력하며, 포괄적 연구를 실행할 인적 자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도적인 시도가 없었음에도 조정은 문화적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수정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특별 허가를 받아 필자가 참관한 공동체 조정에서는 조정자들이 당사자들의 시간, 스토리텔링 방식, 현안 선택을 전혀 제한하지 않았고, 한 당사자가 쉬지 않고 한 시간이 넘게 얘기하기도 했으며, 조정 도중에 식사까지 하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조정자들이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네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정이 문화적 적응과 변화를 거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갈등해결 방식으로써 조정이 각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적응을 겪고 그에 따라 변화가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문화적 접근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영향과 수용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문화적 접근을 연구, 실천한다면 갈등의 원만한 해결과 당사자의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정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나아가 문화를 고려한 적절한 모델이 개발될 수 있다. 이런 의도적인 문화적 접근은 갈등해결 연구자와 실천가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조정자는 당사자의 필요에 최대한 적극 대응하고, 갈등의 해결은 물론 당사자들의 관계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조정 과정을 계획하고 진행하며, 나아가 조정을 갈등의 평화로운 해결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제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문화적 접근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화적 접근을 취할 때 조정자가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문화 민감성 수준을 아는 것이다. 조정자는 흔히 전문 지식을 가진 직업인으로 이해되지만 그것이 어떤 문화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은 있을 수 없으며 조정자 또한 자신의 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문화가 조정 과정과 당사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조정자의 이런 역량을 좌우하는 것 중 하나가 문화 민감성이다. 조정자가 문화 민감성이 높다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강요하거나 언어와 행동을 통해 표출할 가능성은 아주 낮아진다. 조정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조정자가 할 두 번째 일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갈등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문화를 다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문화가 갈등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당사자의 시각으로 갈등을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당사자의 내러티브(narrative)를 해체하고 분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독특성과 그것이 갈등의 발생과 해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상대에게 적용시키려 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으며 그것이 갈등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자가 할 일은 당사자들이 자신과 상대 사이에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이 어떻게 갈등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문화는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해결의 자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문화적 요소의 개입 여부와 수준을 파악하는 것은 조정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중 하나다.

 

조정자가 할 세 번째 일은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가치, 세계관, 도덕적 판단 등을 상호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갈등 당사자들은 같은 주류문화에 속해 있지만 흔히 다른 하위문화(sub-culture)의 영향을 받는다. 같은 한국문화 안에서 생활하지만 지역, 직업, 생활방식, 경제수준, 정치성향, 교육수준 등에 따라 다른 집단에 소속되고 그 집단의 문화에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문화 안에서의 교차문화적(cross-cultural) 상황을 만든다. 조정자는 당사자들이 이런 교차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고 서로 다른 하위문화로 인해 가치, 세계관, 도덕적 판단 등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이런 상호 이해와 인정이 이뤄져야 비로소 갈등 현안에 대한 논의와 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타협할 수 없는 문화적 이해와 그에 근거한 다른 가치, 세계관, 도덕적 판단 등을 둘러싸고 해답 없는 논쟁만 이어가게 된다.

 

조정을 실행할 때 문화적 접근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갈등이 관계의 문제고 사람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문화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갈등은 당사자들의 문화적 차이, 충돌, 경쟁 등을 내포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됨은 물론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화의 영향을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인 조정이 문화를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조정과 한국문화

조정에서 문화적 접근이 불가피한 부분 중 하나라면 한국문화 안에서 실행되는 조정은 어떤 문화적 요소를 고려해야 할까? 활발하지는 않지만 조정은 이미 한국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기제의 하나로 실행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의 요소가 첨가되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구와 실천을 통해 문화적 접근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조정 과정에서 문화적 요소의 고려는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당사자들의 문화와 그것이 갈등에 미친 영향은 서구식 조정 틀 속에서 쉽게 외면되거나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한국문화, 그리고 다양한 하위문화에 대한 적극적 고려 및 포용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앞서 네팔의 경우처럼 서구사회에서 체계화된 조정이 문화적 접근이 불필요한 기제처럼 한국사회에 소개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입장이나 가치는 접어두고 이익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하는 협상과 유사한 단편적인 서구식 조정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오히려 그런 기술적 조정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정에서의 문화적 접근은 한국문화는 물론 그 안의 다양한 하위문화까지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 즉 한국문화가 갈등과 당사자에게 미친 영향은 물론 당사자들이 속한 하위문화가 갈등과 당사자,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미친 영향까지 살펴야 한다. 나아가 그런 문화적 요소가 어떻게 갈등을 악화시키고 다른 한편 갈등의 해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여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집단주의 문화의 성격이 특별히 강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의 역할, 집단의 조화, 체면과 명분의 강조, 그리고 내집단과 외집단의 분명한 구분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한국문화에 속한 개인은 내집단과 운명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고, 내집단의 조화에 기여하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는 체면에 손상을 입게 된다. 이런 한국문화의 요소를 무시했을 때 개인은 내집단 구성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 비난과 충돌이 반복되거나 강화되면 갈등이 된다. 갈등은 다른 집단이나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역할 수행을 방해할 때도 발생한다. 다시 말해 특정 외집단이나 외집단의 구성원들 때문에 자신이 내집단의 조화와 번영에 기여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체면이 손상됐을 경우에도 발생한다. 이렇게 개인이 운명 공동체로 여기고 충성을 바치는 내집단은 가족이나 동료집단에서 직장이나 국가까지 다양하다.

 

한국사회에는 무수한 하위문화가 존재한다. 하위문화를 형성하는 집단은 직장, 동호회, 종교집단, 시민단체, 향우회, 전문직단체, 민족집단 등 다양하다. 한 사람이 주류문화인 한국문화에 속하면서도 다양한 하위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각각의 하위문화가 한국문화를 수용하는 정도는 다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한 개인의 한국문화 수용 정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때로 한국문화보다 특정 하위문화가 개인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집단의 번영 및 조화, 그리고 개인의 기여와 희생을 중요시하는 한국문화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정치적 신념, 도덕성, 직업윤리 등을 중요시하는 하위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일 수도 있다. 이런 하위문화에 속한 개인은 때로 하위문화를 거스르는 한국문화를 강조하는 내집단 구성원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외집단과의 관계에서 한국문화 대신 하위문화를 선택함으로써 갈등에 휘말리기도 한다.

 

한국문화든 한국문화 내의 하위문화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개인의 자연스런 선택과 특징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한국문화의 어떤 점을 공유하는지, 서로 다른 하위문화로 인해 당사자들 사이에 어떤 교차문화적 상황이 형성되고 있는지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갈등 현안을 다루기에 앞서 그런 문화적 공유와 차이를 당사자들도 인식하고 인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조정에서는 어떤 문화적 요소를 고려해야 할까? 여러 가지 점에 대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몇 가지만 정리해보면, 첫째로 당사자를 같은 문화적 영향 하에 있는 집단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집단에 대한 결속과 그 안에서의 역할 수행, 또는 집단의 현재와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잠시 집단은 잊고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른 당사자와의 합의를 위해 집단의 입장 및 이익과 상반되는 선택을 하도록 압력을 가해서도 안 된다. 더 적극적으로는 당사자가 조정 과정에서의 논의 내용과 합의안을 소속감이 강한 가족, 동료, 종교집단 등의 구성원들과 상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집단 구성원들의 반대나 저항에 직면해 후에 합의를 깰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집단을 대표해 조정에 참여한 당사자라면 반드시 집단과 충분한 협의를 한 후 결정을 하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는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은 보통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관계가 없다면 갈등이 발생하지도 지속되지도 않는다. 스쳐가는 사람과는 갈등이 아니라 단순한 이견과 다툼이 생길 뿐이다. 과거 관계가 없는 개인이나 집단과 생기는 갈등도 새롭게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향후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관계는 한국문화는 물론 한국문화 내의 많은 하위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갈등과 관련해 특별히 관계에 신경을 쓰는 것은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치, 역할, 인정 등을 중요시하고 관계 단절을 최악의 상황으로 여기는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 당사자들은 흔히 갈등 상대와의 관계, 그리고 갈등의 영향을 받아 삐걱거리게 된 주변인과의 관계에 신경을 쓴다. 때로는 갈등 상대보다 주변인과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갖기도 한다. 가족이나 직장 내에서 갈등에 직면한 당사자는 주변인들의 비난이나 그들과의 관계를 우려해 갈등 전개를 망설이거나 조기 해결을 모색하기도 한다. 조정은 이런 한국문화를 고려해야 하고, 당사자에게 관계는 잊고 자신이 얻을 분배적 이익만 생각하도록, 또는 분배적 이익을 선택하는 대신 관계를 포기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갈등이 당사자가 관심을 갖는 관계와 어떻게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지를 찾아내고 관계에도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찾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심리적 부담을 떠안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은 갈등을 해결한 뒤 다시는 보지 않을 상대라 할지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비난을 받는 것을 체면의 손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체면을 살릴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입장에 주목하는 것이다. 때로 협상 이론을 강조하는 조정자는 입장은 다뤄봐야 갈등만 악화시키기 때문에 입장은 접어두고 이익에 맞춰 논의와 협상을 하면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입장을 자신의 정체성, 존재 이유, 자신과 소속 집단과의 관계의 문제로 보는 당사자는 입장을 포기할 수 없으며 한국문화에서는 이 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입장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체면과도 관련돼 있다. 그런 입장을 접어두고 이익만 논하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 집단을 버리는 것이며, 자신과 그동안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화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입장은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정돼야 한다. 입장의 근거가 되는 당사자들의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가치, 그리고 문화의 영향을 인정하고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입장을 다뤄야 그 토대 위에서 갈등의 해결을 위해 상호 이익이 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입장을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다루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 존재 이유, 가치관 등을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되고 당사자는 그런 조정 과정에 계속 참여하는 것 자체를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여길 수 있다.

 

한국문화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정자의 권한에 대한 성찰이다. 조정자는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특정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의 권한을 강조하고 그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데 익숙한 한국문화에서는 당사자들이 불필요하게 조정자의 힘을 인정하거나 그 힘에 의지하는 환경이 형성되기 쉽다. 조정자는 당사자들의 그런 오해를 바로 잡고 주어진 권한을 성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정은 당사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합의가 핵심이 되는 갈등해결 기제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당사자들의 갈등 분석과 해결도 힘들어진다. 혹은 조정자의 권한에 의지해 당사자들이 합의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그 합의는 실행되지 않거나 새로운 갈등만 발생시키게 된다.

 

한국문화 안에서 실행되는 조정이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의 특성을 반영하게 되리라는 추측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정 절차 하에서 전체 과정을 관리하고 진행하는 조정자라는 전문가를 두고 있는 정형화된 기제인 조정이 자연스런 문화적 적응을 거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때문에 갈등과 문화, 조정과 문화에 대한 적극적 탐구가 이뤄지지 않으면 조정은 한국문화를 반영할 수 없고 그 결과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무엇보다 조정이 한국문화 안에서 정체성이 형성되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 발생한 갈등을 다루는데 효율적인 기제가 될 수 없으며, 나아가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조정이 한국문화 안에서 잘 정착하고, 한국인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며, 나아가 대화와 합의를 통한 문제해결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제가 되려면 한국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재해석되고 문화적 민감성을 가지고 실행돼야 한다.

 

* 위 글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을 위한 설득과 수사 2015년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무단 복사나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출처를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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