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화를 지향하는가?
2020년 6월 16일 북한이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북한은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에 불만과 위협을 표시하다 결국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폭파에 앞서 북한은 남북 연락사무소 통신선, 군 통신선, 청와대 핫라인 등 모든 남북 간 통신 연락선을 차단했다. 또한 “멀지 않아 쓸모없는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될 거”라고 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조선중앙TV 등은 “대북전단으로 격노한 민심에 부응하고,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 북측 연락사무소를 완전 파괴시켰다”고 보도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이자 극단적인 사건이었다. 건물 폭파 후 치솟는 연기는 우리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 사건은 정부로서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일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많은 사람이 남북 대화 재개에 부정적 시각을 보이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언급한다. 또한 이 사건을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 북한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 나아가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과 대화하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남북문제, 그리고 남북 간에 생기는 사건에 접근할 때 우리 사회 개인과 다양한 집단이 보이는 가장 흔한 모습은 선택적 평화다. 많은 사람이 남북관계가 무난하고 특별한 사건이 없을 때는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고 확신한다. 그러나 남북 사이 정치적, 군사적 충돌과 대립이 이어질 때는 남북관계 지속에 의문을 품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선택적 평화는 모순이다. 평화는 평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는 남북 사이 대립과 충돌이 있을 때 필요하다. 평화연구가 시작된 계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화연구가 조직적으로 시작되고 나아가 평화학이라는 학제로 발전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건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극단의 폭력과 비평화 상황에서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평화를 탐구했고, 이후에는 조직적으로 평화를 실현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평화의 부재가 절실한 평화의 필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평탄하지 않을 때, 그리고 남북 간 대립과 충돌이 있을 때 평화를 논하고 평화를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는 태도와 행동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평화가 필요할 때 평화를 거부하는 건 논리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 그리고 개인이 남북문제와 관련해 보이는 선택적 평화 접근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평화 민감성의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부정적 사건의 되새김을 통해 현재를 규정하는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평화 민감성의 부족을 얘기해보자. 평화 민감성은 평화의 개념과 시각을 통해 직면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능력을 말한다. 평화 민감성을 적용해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는 몹시 폭력적이다. 특히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의 정도는 여전히 심각하다. 예전처럼 이념 문제로 시민을 체포하거나 고문을 하는 국가 폭력은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이념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이념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언어와 행동을 재단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징병제가 계속되고 있고 군대 내 폭력과 병역 의무에서 파생된 젠더 갈등과 여성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통일 담론 및 접근과 관련해 개인 및 집단 사이 충돌과 갈등, 그리고 국가의 일방적 담론 부과와 교육도 계속되고 있다. 평화와 폭력의 개념을 적용할 때 이 모두는 폭력적인 일이지만 우리 사회 대다수 구성원은 그것이 폭력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한반도가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곳에 사는 우리가 평화 민감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규정하는 접근은 여전히 남북관계를 정의하고 남북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학자인 존 폴 레더락은 그의 책 『도덕적 상상력』에서 ‘우리 앞에 놓인 과거’를 언급한다. 피스빌딩(peacebuilding), 다른 말로 평화세우기는 시간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데 평화적 공존이 이뤄지는 미래를 얘기할 때 사람들이 보는 건 미래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의 과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적대 관계를 끝내고 평화적 관계와 공존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규정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가 언급하는 과거는 시간별로 네 개의 층위로 구성된다. 가장 가까운 과거는 ‘최근의 사건들(recent events)’로 불린다. 그다음은 ‘생생한 역사(lived history)’, ‘기억된 역사(remembered history)’, 그리고 역사적 ‘내러티브(narrative)’로 구성된다.
‘최근의 사건들’은 적대적 관계에서 최근에 생긴 일들을 말한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기억하는 최근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다. 물론 좀 더 가면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군사합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2018년의 긍정적인 사건보다 2020년의 부정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생생한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다. 청년과 노인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역사는 다르다. 청년은 북한과 대치했던 군에서의 경험이나 안보 교육에서 얻은 정보, 또는 북한의 연이은 무기 개발을 생생한 역사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노인의 생생한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연평도 포격 사건이나 심지어 한국전쟁에까지 이를 수 있다. ‘기억된 역사’는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기억하는 역사다. 이것은 특히 ‘선택된 트라우마(chosen trauma)’가 된다. 피해에 초점이 맞춰진 이 기억된 역사는 적과 새로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복해 기억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 북한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기억된 역사 중 선택된 트라우마의 역할을 하는 건 단연 한국전쟁이다. 이 기억된 역사, 즉 선택된 트라우마는 북한에 대한 공격과 복수의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내러티브는 남북관계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한국과 한반도라는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한다. 이것은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규정하는 근간이 된다. 이 역시 한국전쟁과 그후 적대적 관계에 가장 깊게 연결돼 있다.
우리가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그리고 평화통일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어떻게 우리 앞의 모든 도전을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할 것이냐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관계에서 부정적 이미지와 인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그를 위해 부정적인 과거를 수시로 소환한다. 다른 한편으로 적대적 남북관계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 다양한 폭력과 평화의 필요성에는 민감하지 않다. 더불어 한반도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평화 민감성이 지속적으로 향상됐다면 과거를 부정적으로 소환하는 접근은 점차 희석되거나 사라지고 과거의 공동 경험을 평화 실현의 디딤돌로 삼는 시도가 계속됐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가 평화를 지향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에 여전히 조건적이고 선택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우리 앞의 과거를 새롭게 정의하고 원칙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남북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미래 비전을 만들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그렇다면 왜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실현 등 평화와 관련된 언급이 많아진 건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평화는 구호가 아니다. 평화는 행동과 실현을 위한 노력을 전제로 하는 언어다. 평화의 실현 가능성은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해 생기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개인과 집단이 평화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평화의 필요성이 내재화돼야 실현을 위한 사회 구조의 형성과 실행이 가능하다. 평화가 내재화되면 어떤 도전적 상황에서도 평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남북관계 개선 내지 정상화, 그리고 그를 위한 남북 대화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다. 이와 관련된 맥락에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가 언급된다. 남북 대화의 필요 및 재개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두 가지는 전쟁 위험의 제거와 남북관계 개선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다.
먼저 전쟁 위험의 제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쟁의 부재는 평화 실현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동시에 평화 정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인류에게 전쟁은 정치적,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대다수 사회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전쟁의 위험은 사라진다. 하지만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더 나아가야 한다.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지만 전쟁 억지력을 명분으로 지속되는 무력 강화는 진정한 한반도 평화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 위험의 제거를 넘어 남북의 평화적 공존으로 전진하기 위해 ‘판문점선언’에서 언급된 것처럼 군축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적 대결을 유지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미래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런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그것은 미래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평화의 비전을 내재화해야 한다. 전쟁을 준비하는 사회에서 평화를 확산시키는 사회로의 변화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경제적 효과를 언급하는 건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 대화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득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 많은 구성원이 경제적 효과에 더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남북이 관계를 정상화하고 미래의 평화통일을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다. 정치적, 군사적 대결과 공격을 중단하고 남과 북 어디에서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평화적 공존을 지속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다. 경제적 효과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목적을 달성했을 때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다.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적 이익이 없으면 남북관계의 개선, 남북의 평화적 공존, 한반도 평화는 필요치 않다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더 부정적이게는 북한을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대상화하고 그 결과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경제적 효과를 중심에 두는 접근은 경제적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면 남북의 적대적 관계와 군사적 대결을 지속해도 상관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경제가 아니라 평화의 실현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또한 평화적 미래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내재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남북은 한국전쟁 후 휴전상태다. 휴전상태인 한반도는 전쟁 중이고 전쟁의 존재는 평화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별 불편함 없이 평화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더라도 우리의 상황은 평화 부재의 상황이다.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야 한반도에 최소한의 평화가 실현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가 왜 필요한지 묻는 건 어리석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전쟁의 지속, 남북 대결의 지속, 평화의 부재는 우리 일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때로는 위협한다. 남북은 군사적 대결과 무기 경쟁에 몰두하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우리 사회 청년들은 군대에 가 통제된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북쪽의 ‘적’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 우리 사회 이념 대결은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적 단절을 지속시킨다. 여전히 우리는 남북관계와 관련된 구조적, 문화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키워드는 평화 부재의 현실에 대한 개인 및 사회의 인식과 평화 필요성의 확인이다. 나아가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필요성의 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평화통일, 한반도 평화 등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교육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많은 사람이 정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정보에 근거해 남북관계나 정부 정책 등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정보가 평화를 가능하게 만들까? 정보가 많으면 평화 인식이 높아질까? 정보에 근거에 평화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접근은 바람직할까? 정보의 양과 평화 인식 및 실현 의지는 정비례할까?
정보 접근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문제와 비교해 남북문제와 관련된 개인의 정보 접근성은 낮은 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남북문제에는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어서 몇몇 정보를 통해 전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남북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정보 획득과 이해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정보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정보의 획득과 평화 인식의 향상 및 평화 실현은 별개의 문제다.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평화의 개념과 시각으로 현재를 분석하는 접근이 필요하고 평화 인식의 내재화가 이뤄져야 한다. 평화의 필요성을 개인과 사회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 인식의 내재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보에 흔들리며 정보에 따라 평화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역전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런 태도와 행동은 지속적 평화 추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평화적 미래를 향한 사회의 방향과 정책 결정을 어렵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정보를 이용해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평화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그리고 다른 한편 적대적 관계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정치인들이나 집단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정보는 평화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평화 실현의 원칙 위에서 유연성 있는 상황 대응을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평화의 내재화와 함께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평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평화적 상상은 ‘10년, 20년 후 미래의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일 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남북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남북관계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까?’ 등을 상상해보는 능력을 말한다. 평화 인식 위에서 평화로운 한반도를 추구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상력’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력을 허무맹랑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사회와 세계의 발전은 지금까지 상상력에 기반해 이루어졌다. 우리 사회도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발전된 미래사회를 위한 과학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서는 상상력이 강조되지 않는다. 적대적이고 불투명한 남북관계의 지속으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적 미래에 대한 상상은 오히려 순진한 접근으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불순한 상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나은, 나아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과 평화가 정착된 한반도를 상상하지 않고는 평화 실현을 위한 현재의 구체적인 접근을 구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평화가 성취된 한반도의 미래상이 없이는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평화적 상상력에 근거해 이뤄진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다. 2000년 시작된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사업, 그리고 금강산관광 사업이 그랬다. 2018년 이뤄진 판문점선언과 남북군사합의도 마찬가지다. 모두 현재의 적대적 관계를 바꾸고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상상력에 기반해 이뤄진 일들이었다. 가시적 성과가 두드러지진 않지만 시민사회와 정부 차원에서 현재 시도되는 모든 노력과 정책 또한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다양한 시도가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과 사회의 평화 인식 내재화가 빈약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노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개선, 남북의 평화적 공존,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실현 및 정착을 위해서는 평화적 상상력을 토대로 남북관계를 새롭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남북의 대립과 대결을 갈등(conflict)으로 보는 시각은 남북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제관계에서 국가 사이 갈등의 존재는 흔한 일이며 남북 사이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남북 갈등은 ‘protracted & intractable conflict’, 그러니까 ‘오래 지속된 다루기 힘든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세계 다른 곳의 사례와 비교해도 그리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남북관계를 갈등 관계로 보면 북한을 ‘적’ 또는 ‘악’이 아닌 남한과 똑같이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갈등 당사자로 볼 수 있다. 정치적, 군사적 대립과 충돌은 갈등이 지속되는 관계에서 생기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갈등 관계로 보면 남북 사이 장기간의 대립과 충돌을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동시에 장기간 지속된 문제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고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갈등 관계로 보면 남북 사이에 상호의존성이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다. 갈등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 사이 존재하는 상호의존성은 갈등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갈등을 공유하며 상대의 갈등 해결이 곧 자신의 갈등 해결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갈등의 시각으로 보면 남북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다른 입장을 가지고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갈등 당사자들의 보편적인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북문제를 갈등으로 보고 상호의존성에 기반해 상호 이익을 위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것 또한 평화적 상상력에 기반할 때 훨씬 잘 접근할 수 있다.
평화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평화의 내재화를 통해 평화를 기준으로 삼고 평화적 방식을 원칙으로 삼으며 평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를 구상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평화 실현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도 마찬가지다.
* 위 글은 국립통일교육원의 <통일정책차세대과정> 세미나 발제문이며 무단 인용과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 각주는 생략됐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는가?
2020년 6월 16일 북한이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북한은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에 불만과 위협을 표시하다 결국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폭파에 앞서 북한은 남북 연락사무소 통신선, 군 통신선, 청와대 핫라인 등 모든 남북 간 통신 연락선을 차단했다. 또한 “멀지 않아 쓸모없는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될 거”라고 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조선중앙TV 등은 “대북전단으로 격노한 민심에 부응하고,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 북측 연락사무소를 완전 파괴시켰다”고 보도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이자 극단적인 사건이었다. 건물 폭파 후 치솟는 연기는 우리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이 사건은 정부로서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일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많은 사람이 남북 대화 재개에 부정적 시각을 보이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언급한다. 또한 이 사건을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 북한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 나아가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과 대화하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남북문제, 그리고 남북 간에 생기는 사건에 접근할 때 우리 사회 개인과 다양한 집단이 보이는 가장 흔한 모습은 선택적 평화다. 많은 사람이 남북관계가 무난하고 특별한 사건이 없을 때는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고 확신한다. 그러나 남북 사이 정치적, 군사적 충돌과 대립이 이어질 때는 남북관계 지속에 의문을 품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선택적 평화는 모순이다. 평화는 평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는 남북 사이 대립과 충돌이 있을 때 필요하다. 평화연구가 시작된 계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화연구가 조직적으로 시작되고 나아가 평화학이라는 학제로 발전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건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극단의 폭력과 비평화 상황에서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평화를 탐구했고, 이후에는 조직적으로 평화를 실현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평화의 부재가 절실한 평화의 필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평탄하지 않을 때, 그리고 남북 간 대립과 충돌이 있을 때 평화를 논하고 평화를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는 태도와 행동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평화가 필요할 때 평화를 거부하는 건 논리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 그리고 개인이 남북문제와 관련해 보이는 선택적 평화 접근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평화 민감성의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부정적 사건의 되새김을 통해 현재를 규정하는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평화 민감성의 부족을 얘기해보자. 평화 민감성은 평화의 개념과 시각을 통해 직면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능력을 말한다. 평화 민감성을 적용해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는 몹시 폭력적이다. 특히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의 정도는 여전히 심각하다. 예전처럼 이념 문제로 시민을 체포하거나 고문을 하는 국가 폭력은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이념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이념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언어와 행동을 재단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징병제가 계속되고 있고 군대 내 폭력과 병역 의무에서 파생된 젠더 갈등과 여성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통일 담론 및 접근과 관련해 개인 및 집단 사이 충돌과 갈등, 그리고 국가의 일방적 담론 부과와 교육도 계속되고 있다. 평화와 폭력의 개념을 적용할 때 이 모두는 폭력적인 일이지만 우리 사회 대다수 구성원은 그것이 폭력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한반도가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곳에 사는 우리가 평화 민감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규정하는 접근은 여전히 남북관계를 정의하고 남북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학자인 존 폴 레더락은 그의 책 『도덕적 상상력』에서 ‘우리 앞에 놓인 과거’를 언급한다. 피스빌딩(peacebuilding), 다른 말로 평화세우기는 시간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데 평화적 공존이 이뤄지는 미래를 얘기할 때 사람들이 보는 건 미래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의 과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적대 관계를 끝내고 평화적 관계와 공존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규정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가 언급하는 과거는 시간별로 네 개의 층위로 구성된다. 가장 가까운 과거는 ‘최근의 사건들(recent events)’로 불린다. 그다음은 ‘생생한 역사(lived history)’, ‘기억된 역사(remembered history)’, 그리고 역사적 ‘내러티브(narrative)’로 구성된다.
‘최근의 사건들’은 적대적 관계에서 최근에 생긴 일들을 말한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기억하는 최근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다. 물론 좀 더 가면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군사합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2018년의 긍정적인 사건보다 2020년의 부정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생생한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다. 청년과 노인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역사는 다르다. 청년은 북한과 대치했던 군에서의 경험이나 안보 교육에서 얻은 정보, 또는 북한의 연이은 무기 개발을 생생한 역사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노인의 생생한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연평도 포격 사건이나 심지어 한국전쟁에까지 이를 수 있다. ‘기억된 역사’는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기억하는 역사다. 이것은 특히 ‘선택된 트라우마(chosen trauma)’가 된다. 피해에 초점이 맞춰진 이 기억된 역사는 적과 새로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복해 기억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 북한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기억된 역사 중 선택된 트라우마의 역할을 하는 건 단연 한국전쟁이다. 이 기억된 역사, 즉 선택된 트라우마는 북한에 대한 공격과 복수의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내러티브는 남북관계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한국과 한반도라는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한다. 이것은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규정하는 근간이 된다. 이 역시 한국전쟁과 그후 적대적 관계에 가장 깊게 연결돼 있다.
우리가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그리고 평화통일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어떻게 우리 앞의 모든 도전을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할 것이냐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관계에서 부정적 이미지와 인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그를 위해 부정적인 과거를 수시로 소환한다. 다른 한편으로 적대적 남북관계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 다양한 폭력과 평화의 필요성에는 민감하지 않다. 더불어 한반도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평화 민감성이 지속적으로 향상됐다면 과거를 부정적으로 소환하는 접근은 점차 희석되거나 사라지고 과거의 공동 경험을 평화 실현의 디딤돌로 삼는 시도가 계속됐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가 평화를 지향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에 여전히 조건적이고 선택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우리 앞의 과거를 새롭게 정의하고 원칙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남북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미래 비전을 만들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그렇다면 왜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실현 등 평화와 관련된 언급이 많아진 건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평화는 구호가 아니다. 평화는 행동과 실현을 위한 노력을 전제로 하는 언어다. 평화의 실현 가능성은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해 생기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개인과 집단이 평화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평화의 필요성이 내재화돼야 실현을 위한 사회 구조의 형성과 실행이 가능하다. 평화가 내재화되면 어떤 도전적 상황에서도 평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남북관계 개선 내지 정상화, 그리고 그를 위한 남북 대화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다. 이와 관련된 맥락에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가 언급된다. 남북 대화의 필요 및 재개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두 가지는 전쟁 위험의 제거와 남북관계 개선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다.
먼저 전쟁 위험의 제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쟁의 부재는 평화 실현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동시에 평화 정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인류에게 전쟁은 정치적,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대다수 사회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전쟁의 위험은 사라진다. 하지만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더 나아가야 한다.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지만 전쟁 억지력을 명분으로 지속되는 무력 강화는 진정한 한반도 평화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 위험의 제거를 넘어 남북의 평화적 공존으로 전진하기 위해 ‘판문점선언’에서 언급된 것처럼 군축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적 대결을 유지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미래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런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그것은 미래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평화의 비전을 내재화해야 한다. 전쟁을 준비하는 사회에서 평화를 확산시키는 사회로의 변화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경제적 효과를 언급하는 건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 대화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득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 많은 구성원이 경제적 효과에 더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남북이 관계를 정상화하고 미래의 평화통일을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다. 정치적, 군사적 대결과 공격을 중단하고 남과 북 어디에서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평화적 공존을 지속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다. 경제적 효과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목적을 달성했을 때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다.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적 이익이 없으면 남북관계의 개선, 남북의 평화적 공존, 한반도 평화는 필요치 않다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더 부정적이게는 북한을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대상화하고 그 결과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경제적 효과를 중심에 두는 접근은 경제적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면 남북의 적대적 관계와 군사적 대결을 지속해도 상관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경제가 아니라 평화의 실현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또한 평화적 미래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내재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는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남북은 한국전쟁 후 휴전상태다. 휴전상태인 한반도는 전쟁 중이고 전쟁의 존재는 평화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별 불편함 없이 평화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더라도 우리의 상황은 평화 부재의 상황이다.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야 한반도에 최소한의 평화가 실현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가 왜 필요한지 묻는 건 어리석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전쟁의 지속, 남북 대결의 지속, 평화의 부재는 우리 일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때로는 위협한다. 남북은 군사적 대결과 무기 경쟁에 몰두하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우리 사회 청년들은 군대에 가 통제된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북쪽의 ‘적’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 우리 사회 이념 대결은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적 단절을 지속시킨다. 여전히 우리는 남북관계와 관련된 구조적, 문화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키워드는 평화 부재의 현실에 대한 개인 및 사회의 인식과 평화 필요성의 확인이다. 나아가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 필요성의 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평화통일, 한반도 평화 등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교육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많은 사람이 정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정보에 근거해 남북관계나 정부 정책 등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정보가 평화를 가능하게 만들까? 정보가 많으면 평화 인식이 높아질까? 정보에 근거에 평화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접근은 바람직할까? 정보의 양과 평화 인식 및 실현 의지는 정비례할까?
정보 접근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문제와 비교해 남북문제와 관련된 개인의 정보 접근성은 낮은 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남북문제에는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어서 몇몇 정보를 통해 전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남북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정보 획득과 이해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정보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정보의 획득과 평화 인식의 향상 및 평화 실현은 별개의 문제다.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평화의 개념과 시각으로 현재를 분석하는 접근이 필요하고 평화 인식의 내재화가 이뤄져야 한다. 평화의 필요성을 개인과 사회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 인식의 내재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보에 흔들리며 정보에 따라 평화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역전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런 태도와 행동은 지속적 평화 추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평화적 미래를 향한 사회의 방향과 정책 결정을 어렵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정보를 이용해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평화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그리고 다른 한편 적대적 관계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정치인들이나 집단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정보는 평화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평화 실현의 원칙 위에서 유연성 있는 상황 대응을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평화의 내재화와 함께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평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평화적 상상은 ‘10년, 20년 후 미래의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일 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남북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남북관계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까?’ 등을 상상해보는 능력을 말한다. 평화 인식 위에서 평화로운 한반도를 추구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상력’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력을 허무맹랑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사회와 세계의 발전은 지금까지 상상력에 기반해 이루어졌다. 우리 사회도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발전된 미래사회를 위한 과학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서는 상상력이 강조되지 않는다. 적대적이고 불투명한 남북관계의 지속으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적 미래에 대한 상상은 오히려 순진한 접근으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불순한 상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나은, 나아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과 평화가 정착된 한반도를 상상하지 않고는 평화 실현을 위한 현재의 구체적인 접근을 구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평화가 성취된 한반도의 미래상이 없이는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평화적 상상력에 근거해 이뤄진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다. 2000년 시작된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사업, 그리고 금강산관광 사업이 그랬다. 2018년 이뤄진 판문점선언과 남북군사합의도 마찬가지다. 모두 현재의 적대적 관계를 바꾸고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상상력에 기반해 이뤄진 일들이었다. 가시적 성과가 두드러지진 않지만 시민사회와 정부 차원에서 현재 시도되는 모든 노력과 정책 또한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다양한 시도가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과 사회의 평화 인식 내재화가 빈약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노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개선, 남북의 평화적 공존,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실현 및 정착을 위해서는 평화적 상상력을 토대로 남북관계를 새롭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남북의 대립과 대결을 갈등(conflict)으로 보는 시각은 남북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제관계에서 국가 사이 갈등의 존재는 흔한 일이며 남북 사이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남북 갈등은 ‘protracted & intractable conflict’, 그러니까 ‘오래 지속된 다루기 힘든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세계 다른 곳의 사례와 비교해도 그리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남북관계를 갈등 관계로 보면 북한을 ‘적’ 또는 ‘악’이 아닌 남한과 똑같이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갈등 당사자로 볼 수 있다. 정치적, 군사적 대립과 충돌은 갈등이 지속되는 관계에서 생기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갈등 관계로 보면 남북 사이 장기간의 대립과 충돌을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동시에 장기간 지속된 문제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고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갈등 관계로 보면 남북 사이에 상호의존성이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다. 갈등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 사이 존재하는 상호의존성은 갈등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갈등을 공유하며 상대의 갈등 해결이 곧 자신의 갈등 해결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갈등의 시각으로 보면 남북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다른 입장을 가지고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갈등 당사자들의 보편적인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북문제를 갈등으로 보고 상호의존성에 기반해 상호 이익을 위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것 또한 평화적 상상력에 기반할 때 훨씬 잘 접근할 수 있다.
평화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평화의 내재화를 통해 평화를 기준으로 삼고 평화적 방식을 원칙으로 삼으며 평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를 구상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평화 실현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한반도 평화도 마찬가지다.
* 위 글은 국립통일교육원의 <통일정책차세대과정> 세미나 발제문이며 무단 인용과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 각주는 생략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