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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에 일상의 평화만들기

분단 시대: 평화 부재의 상황

한반도는 분단돼 있다. 올해는 남북 분단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긴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보면 숫자의 다름 외에 69년과 70년 사이에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올해 곳곳에서 분단 70주년 관련 행사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70년이 갖는 무게감을 남다르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중 분단 70년을 기억하고 특별한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한반도, 아니 우리가 그나마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중 몇 퍼센트가 올해가 분단 7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오래된 분단이 우리의 삶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을까?

 

분단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분단’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바로 남과 북이 예전에는 한 나라였으며 다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동의다. 그런 동의가 없다면 분단 70주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그리고 수단과 남수단은 예전에 한 나라였지만 그들은 분단 상태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 나라들은 각각 독립국가로 존재하고 있고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이유도 의지도 전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분단 70주년과 관련해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진다. 바로 ‘분단 70주년’란 말 자체가 한반도 상황에 대한 특정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한반도에 남한과 북한, 두 나라가 있는 것은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대충 살펴봐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분단 70주년을 얘기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의미를 되새기는 기관, 단체, 개인도 많다. 분단보다는 어쩐지 긍정적인 접근인 것 같기도 하다. 같은 70주년이지만 어떤 것에 오롯이, 또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상황을 보는 기관, 단체, 개인의 인식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현실이 또 다른 분단의 상징이 되고 있다.

 

분단을 얘기하든, 또는 광복을 얘기하든 상관없이 사실 우리사회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한반도가 분단돼 있다는 전제 하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정치적 성향이나 민관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분단을 전제로 한 말이다. 문제는 그 말이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의미가 퇴색했고 울림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런 효력 없는 ‘주문’ 정도로 전락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을 만들어낸 상황, 그러니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했고 자각하고 있었던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평화 부재의 현실을 야기했고 그 현실은 약간의 기복을 거쳤을뿐 지금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단과 관련된 우리사회의 평화 부재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록 남과 북이 대결하고 있고 때로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전쟁 없이 무난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개인 차원에서는 정치나 남북 대결과는 상관없이 각자 평화롭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평화 부재’라는 주장을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대결의 영향 하에 있는 우리의 현실은 이론적으로 보면 분명 평화 부재의 상황이다. 평화 부재를 주장하기 위해 평화의 기초 이론을 잠깐 소개하면, 평화는 크게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된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힘을 통해 신체에 직접 가해지는 폭력, 그러니까 죽임, 상해, 폭언 등이 없는 상태를 말하며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평화를 말한다. 적극적 평화는 물리적 힘을 이용한 폭력은 물론 사회와 집단의 비뚤어진 구조와 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나 담론의 부과와 강요 등 문화를 통해 가해지는 폭력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적극적 평화는 모든 폭력이 사라질 때 성취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남북 대결의 상황은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국지전이나 무력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최소한의 평화, 그러니까 물리적 힘에 의한 폭력이 없고 그에 따라 신체적 안전이 보장되는 소극적 평화조차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가장 강력한 물리적 폭력을 야기하는 전쟁 또는 무력 충돌에 항상 노출돼 있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한 마디로 평화가 없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직면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런 우리의 일상은 심각한 평화 부재의 상황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충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긍정의 힘’이나 ‘정신 승리’가 아니라 착각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평화 부재의 상황을 평화의 상황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인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산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와의 무력 충돌, 20세기 초에 시작된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독립의 기쁨을 무색하게 하고 연이어 일어난 한반도의 분단, 한국전쟁 등 안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혼란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분단이 고착화됐고 남북의 적대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한은 독재와 인권유린의 시대를 넘어 가까스로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북한은 여전히 독재 하에 있다. 남한은 민주주의를 성취했지만 그 질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고 북한과의 대립과 대결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이렇게 가까운 역사를 돌아보면 현재 살고 있는 사람 누구도 정치적으로 불안하지 않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전쟁의 위험이 전혀 없고, 적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는 평화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평화에 대한 감각 자체를 발달시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쟁은 없지만 그렇다고 평화가 있는 것도 아닌 한반도 상황을 당연하게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휴전협정과 남북 대결 하의 불안한 평화를 평화로 착각하고 살게 된 것이다.

 

평화 감각의 부재를 잘 설명해주는 예를 한번 들어보자.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2012년 말 북한이 핵탄두를 실려보낼 수 있는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남한이 그것을 맹비난하면서 긴장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유엔이 제재까지 했지만 북한은 2013년 초에는 핵무기 실험까지 했다. 남북은 문제 해결에 주력하기보다 날선 공방을 이어갔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이전보다 얼어붙었고 결국 개성공간의 폐쇄라는 결과까지 낳았다. 이때 전 세계 언론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불안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귀국까지 고려했다. 그렇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느긋했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생필품 사재기도 없었다. 내공이 탄탄해서인지, 인내심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국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당시 상황은 정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남한이나 북한의 정치 지도층과 군의 어느 어느 한 사람이 잘못 마음을 먹거나 실수를 하면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국지전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는 그렇게 느긋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용기가 있거나 침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그런 상황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단 상황에서, 그리고 남북이 으르렁거리는 상황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런 일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불감증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평화 감각 자체를 발달시키지 못한 것이다.


일상의 평화만들기

평화 부재의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평화다. 특별히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평화는 매일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일상의 평화다. 한반도 분단과 관련해 이런 일상의 평화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신체에 대한 최대의 위협인 전쟁이나 무력충돌에 대한 우려 없이 각자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고 살 수 있게 해주는 평화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소극적 평화의 성취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야기하는 평화 부재의 상황을 자신의 일상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곤 한다. 분단 상황은 그저 정치나 이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고 먹고 사는 문제나 안전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한과 북한이 으르렁거리기는 할망정 이미 분단 상황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자멸을 부르는 무력 충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지만 무력 충돌이 없다고 가능성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남한과 북한이 군사력 강화에 쏟는 관심과 재원, 그리고 그런 선택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정치 지도층, 군, 시민들의 존재는 무력충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다. 때문에 완전한 신체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하나의 평화는 신체적 안전의 보장은 물론 구조와 문화를 이용한 폭력까지 없는 적극적 평화의 성취다. 이것은 생존과 신체적 안전을 넘어 삶의 질을 좌우하는 평화다. 한반도 분단 상황은 우리사회에서 구조와 문화를 이용한 폭력을 강화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폭력을 찾아내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이념 대립에 의존하고 이념 대립을 강화하는 정치, 군사력 강화와 무력 대결을 강화시키는 통치 및 행정 체계, 남북 대립 및 경쟁과 그에 따른 외교 정책, 국민 안전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우선하는 사법 및 행정 제도, 시민 안전과 삶의 질 향상을 좌우하는 교육 및 복지 현안의 외면 등 분단 상황에서 야기된 구조적 문제는 수없이 많다. 특정 이념과 담론의 강요, 표현의 자유 제한과 자체 검열 문화, 안보 담론의 부과 및 확산 등 문화를 왜곡시키고 악용하는 폭력 또한 만연돼 있다. 한 마디로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를 위해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희생시키는 구조와 문화로 인해 일상의 평화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 사실 국제사회에서는 국가안보가 군사력에 대한 초점에서 벗어나 경제력 및 외교력 강화를 통한 국익과 국민 보호, 그리고 국민 각자의 생존, 번영, 인권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됐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분단 상황을 빌미로 여전히 군사력에 의존한 국가와 영토 보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아가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국가에 초점을 맞춘 국가안보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회 구성원 각자의 안전과 번영에 초점을 맞춘 보다 진보한 ‘인간안보(human security)' 개념을 발전시켰다. 인간안보는 경제, 식량, 건강, 환경, 신체 보전, 공동체 유지, 정치 등 포괄적 현안과 관련해 개인의 안전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남북 대결과 군사적 긴장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분단 상황이 개인의 안전과 삶의 질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일상의 평화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분단 상황으로 일상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 중 어쩌면 가장 심각한 것은 일상에서 수시로 직면하게 되는 대립과 분열이다. 남북문제와 관련된 정치, 정책, 이념, 담론 때문에 공동체, 조직, 사회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불신, 대립, 분열이 생기고 그로 인해 받는 생활 스트레스는 상당히 크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분단 상황과 그로 인한 이념 대립, 그리고 태도와 행동 원칙의 차이는 교회 내 분열을 야기하고 대립을 고착시켰다. 이제는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처럼 생각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교회 내 분열과 대립은 지도층의 문제고 많은 교회 구성원들은 그런 대립과 대결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성원들은 여전히 그런 대립과 분열의 영향 하에 있고 때때로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분단 상황과 그로 인해 야기된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해석과 접근법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상의 평화를 성취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분단 상황에서 일상의 평화만들기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나는 현재의 다툼과 분열을 멈추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의 회복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평화만들기, 그러니까 영어로 peacemaking은 말 그대로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만들기는 평화가 없는 상황, 다시 말해 폭력적 상황의 종식에 초점을 맞춘다. 평화조약을 통한 전쟁의 종식이나 합의에 의한 다툼과 갈등의 해결이 바로 평화만들기다. 그런데 이때의 평화는 아주 허술하고 불안하다. 때문에 평화만들기 다음에는 불안한 평화를 지키는 일, 바로 평화지키기(peacekeeping)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평화만들기는 지속적 평화의 시작이자 토대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 없는 절차다. 또한 평화만들기를 위해 취해지는 방법과 과정은 향후 평화의 질과 지속 여부, 그리고 관계의 회복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중한 계획과 선택을 필요로 한다.

 

모든 평화만들기의 기본적 접근은 대화와 합의다. 평화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식하려 할 때도, 해결책 모색을 통해 싸움이나 갈등을 끝내려 할 때도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은 대화와 합의다. 강한 쪽이 약한 쪽을 굴복시키고 전쟁이나 갈등을 끝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만들기로 불리지 않는다. 모두의 평화를 보장하지 않고 강자의 평화만을 부과함으로써 약자에게는 폭력적 상황을 만들고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기 때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분열과 대립을 끝내고 일상의 평화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우선적 일도 대화와 합의다. 그리고 대화와 합의는 국가 차원에서 공동체와 개인 차원까지 모든 층위에 적용된다. 특별히 일상의 평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대화와 합의는 한반도 분단 및 남북 대결의 의미와 영향, 일상의 평화를 위한 바람직한 남북 관계, 미래 한반도의 모습 등 기본적인 현안들을 개인, 공동체, 국가 차원에서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정치적, 이념적 담론과 선택이 우리가 참여한 아래로부터의(상향식) 접근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엘리트들에 의해 결정되고 위로부터 아래로 부과된(하향식)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깨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과 바람을 중심에 둔 일상의 평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평화만들기를 목표로 한 대화와 합의를 위해 해체와 재해석이 필요한 기본적인 질문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분단 상황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방법은 무엇인가?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정치 사회 현안이 생길 때마다,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것이 이념 대립이다. 때문에 국민의 삶을 다루는 문제들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선회할 때가 많다. 정치적 성향과 이념을 초월해 이런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분단 상황에서 개인의 안전과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안전과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담론이 힘을 얻어왔다. 국가와 개인의 안전을 모두 담보하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담론의 개발은 활발히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와 개인 차원의 문제 모두를 염두에 둔 분단 상황의 진단과 해석을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군비 증강과 무기 경쟁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무력에 기댄 한반도의 왜곡된 평화 유지는 무기 경쟁을 가속시키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주력하고 남한은 그에 대한 대응 명분으로 군비 증강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는 물론 교회도 지금까지 남북의 무기 경쟁, 무력 대결, 국방 예산, 군축 등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화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방비 예산은 증가하고 남북 대결은 가속될 수밖에 없다.


 통일은 왜 당연한 민족적 목표가 돼야 하는가? 과연 그런가?

통일의 당위성은 이제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는 물론 장년층까지도 통일을 하면 오히려 남한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통일의 당위성이 아니라 통일이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한 대화부터 해봐야 한다.


 대중적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사회는 물론 교회에도 대중적 한반도 평화 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중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가 거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전문 지식의 나열에 집중하며, 대중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의 변화를 위해 일상의 평화에 초점을 맞춘 대화와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교회 안의 대립과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안의 이념 대립은 한국 교회의 불치병처럼 취급돼 왔다. 이것은 교회의 한반도 평화 통일 담론과 실행 원칙이 사회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맞는 교회의 담론을 교회 대중과 함께 어떻게 만들고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대화가 교회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청년의 평화만들기

한반도 분단 상황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은 대충 짐작하건데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삶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흔히 거시적 문제, 그것도 극단적인 정치 및 이념 문제와 얽혀 있는 분단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청년들은 5포(연애, 결혼, 출산, 내집 마련, 인간관계의 포기) 세대라 불리기도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이나 평화에 대한 관심이 당면한 5포 상황을 타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럼에도 청년들이 적어도 가끔은 분단 상황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분단 상황이 자신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이고, 그것이 개인 삶을 좌우하는 정치 사회 구조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원칙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사는 환경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이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떠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분단이 일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을 끝내기 위한, 그리고 자신의 안전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우선 목표는 궁극적으로 분단 상황의 종식 또는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겠지만 실천 목표는 분단 상황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사회 집단 또는 세대 사이에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동 이해 및 행동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접근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화를 통해 공동 이해와 행동에 대한 합의를 이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는 한반도 분단 및 평화의 독점 상황을 깨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분단과 관련된 논의는 정부와 정치 사회 엘리트 주도로, 그리고 시민사회의 비판적 감시 및 대응 담론 개발로 이뤄져왔다. 평범한 청년들을 포함한 일반 대중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런 환경은 한반도 분단 상황과 평화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무관심을 야기하고, 그 결과 정부, 엘리트 집단, 시민단체의 독점은 더욱 강화됐다. 분단 상황과 그것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과 도전적 상황을 타개할 정책 및 방안의 모색은 소수 그룹 안에서만 논의되고 결정되는 환경이 고착됐다. 이런 환경은 통일운동, 한반도 평화 논의, 대북 정책 등과 관련된 대중 담론의 부재, 정부의 일방적 결정, 소수 집단의 대응 담론 형성의 결과를 만들었고 대중은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 내지는 방관자가 됐다. 제대로 된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그 자체로 이런 독점 상황을 깨는 도전이 돼야 한다. 다시 말해 기존의 해석과 담론을 벗어나 스스로 분단 상황을 정의하고 재해석하며 청년의 담론을 만드는 시도가 돼야 한다.


 이런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기본적인 질문들을 청년의 시각으로 다루고 기존의 이해를 해체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그런 후 공동의 이해를 만들고 그 위에서 공동의 행동을 합의해나간다면 점차 분단 상황의 변화와 평화의 실현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해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 엘리트 집단, 시민단체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한 청년 집단 내의 정형화된 담론과 이해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다룰 수 있는 몇 가지 질문들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청년이 한반도 분단 상황과 평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청년이 정말 분단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인가? 관심을 가진다면 분단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무관심해도 되는가? 대화를 통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고 공동의 이해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 및 평화와 관련해 다뤄져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분단 상황을 타개하고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다뤄야할 문제들은 무엇이며 왜 그 문제들을 다뤄야 하는가? 그 문제들에 대해 이미 형성돼 있는 담론은 무엇이며 청년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면 어떻게 재해석 또는 수정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존의 담론이나 이해를 해체하고 청년의 담론을 만들고 공동의 이해를 형성하게 해줄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비전은 무엇인가?

청년이 필요로 하는 한반도 평화 비전은 어떤 것인가? 기성세대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왜 그런 평화가 필요하고, 그렇다면 그 비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한반도 평화가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기에 평화 비전도 대화를 통해 함께 만들고 그에 대한 점진적 합의를 이뤄가야 한다.


 누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

한반도 분단 및 평화의 독점 상황을 깨기 위한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또 다른 독점을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지에 대한 신중한 논의와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정치 사회 엘리트가 해왔던 방식을 답습한다면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새로운 시도를 만들고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없다. 나아가 청년의 담론을 다른 사회 집단들과 공유하고 공동의 평화 비전을 만들기 위해 다른 집단의 누구를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을 깨고 일상의 평화를 만드는 일은 한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중요하고 도전적인 현안 중 하나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직접, 간접으로 항상 영향을 미치는 문제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동안 이에 대한 정책, 담론, 운동 등에 큰 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전 세대의 중간에 서 있으며 한국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 세대가 분단 상황과 평화에 관심을 가진다면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에 긍정적 변화가 생길 것이다. 청년 세대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특별히 청년의 평화만들기는 분단 상황을 일상의 평화 현안으로 재해석하고 분단 상황이 시시때때로 개인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타개할 새로운 담론과 행동 방식을 만드는데 기여함으로써 한국사회 전체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 이 글은 2015년 5월 2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기독청년 통일아카데미 발제문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각주는 생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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