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대
본 발제문을 쓰고 있는 2024년 3월 초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째에 접어들었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은 6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1년 이상 답보상태였고 가자지구 전쟁은 5개월 내내 이스라엘의 일방적 공격과 가자지구 초토화 작전이 주를 이뤘다. 두 개의 전쟁은 여러 가지를 시사해주었다. 가장 주목할 건 전 세계가 두 개의 전쟁을 통해 전쟁 자체에, 그리고 전쟁의 정당성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점은 전쟁 상황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전쟁이 야기하는 인명 피해와 사회 파괴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전쟁이 야기하는 인도주의 재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높아졌다. 그런데 가장 주목할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전쟁을 종식하지도, 인도주의적 재난을 막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이스라엘의 집단학살(genocide)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았다. 지난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ICJ)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집단학살 혐의로 제소한 사건을 심리한 후 사실상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혐의를 인정하고 이를 예방할 임시조치(provisional measures)를 명령하면서 1개월 안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상대로 무차별 공격과 집단학살을 중단하지 않았고 보고서도 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ICJ가 휴전을 명령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국제사회는, 그리고 세계시민 사회는 이스라엘을 중단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신속하게 이뤄졌으나 결과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사망자는 전쟁 발생 거의 2주년이 되는 2024년 2월 15일 현재 1만 582명이었다. 여기에는 587명 어린이 사망자가 포함됐다. 부상자는 1만 9,875명이었고 이중 어린이는 1,298명이었다. 전쟁 후 약 1년이 지난 시점인 2023년 1월 말 현재 우크라이나 난민은 약 800만명이었다. 전쟁이 3년째에 접어든 2024년 3월 초 현재 여전히 약 648만명이 국외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었다. 가자지구 전쟁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전쟁 시작 후 5개월이 지난 2024년 3월 10월 현재 가자지구 주민 사망자는 3만 960명이었고 부상자는 7만 2,524명이었다. 사망자 중 약 70%가 어린이와 여성이었다. 이스라엘 사망자는 10월 7일 하마스 공격으로 인해 발생한 1,139명이 유지됐고 100명 이상의 인질이 가자지구에 억류되어 있었다.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전쟁 중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이스라엘의 봉쇄로 국외 난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230만 명의 주민 중 약 85%가 이주민이 됐다. 특히 이스라엘의 봉쇄와 구호품 지원 통제로 가자지구는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 상황에 직면했다. 2월 중순부터 유엔과 구호단체들은 굶주림에 의한 대량 사망자 발생을 우려했고 2월 말이 되자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자 발생, 특히 어린이 사망자 발생은 현실이 됐다. 사상자에 더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모두 심각한 사회 파괴가 발생했다. 복구에는 향후 수십 년이 걸릴 전망이고 가자지구의 경우 복구가 가능한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은 다른 면에서 세계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시사했다. 그것은 두 전쟁 모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위한 대리전을 했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로 집단학살을 저지르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했다. 그 기저에는 중동과 유럽에서 패권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 미국과의 정치적.군사적 협력을 유지하고 국익을 챙기려는 유럽 국가들의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는 전 세계 정치.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을 야기한 두 개의 전쟁이 미국과 그에 협력하는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됐음을 말해준다. 또한 세계가 이런 국가들의 이익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봤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많은 사람이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고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만 진행 중인 건 아니다. 예멘, 소말리아, 시리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내전이 진행 중이다. 국가 사이 전쟁이 아닌 내전은 국내 문제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지만 인명 피해와 인도주의 재난 수준은 국가 사이 전쟁보다 전혀 덜하지 않다. 또한 대부분의 내전에는 소위 세계 및 지역 강대국들의 이권이 얽혀 있고 그런 이유로 타국의 노골적인 무력 개입이 이뤄지곤 한다. 세계는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과 난민 사태가 야기되기 전까지는, 명확히는 그런 상황이 영상 뉴스로 전해지기 전까지는 내전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세계는 전쟁으로 전쟁을 지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개의 전쟁이 시사하는 또 다른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세계 곳곳의 내전은 잊혀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잊혀졌다. 전쟁과 관련해 드러난 국제사회와 세계인의 민낯이다.
전쟁 영향의 세계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인은 세계화 시대에 전쟁이 절대 국지적인 사건이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이전에 시리아 내전이 야기한 난민 문제가 세계에 무거운 고민을 던지기는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만큼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인의 일상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가장 즉각적이고 심각했던 건 곡물 가격의 급상승이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당장 밀 수출에 차질을 빚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을 막았고, 국제사회의 제재로 러시아는 밀 수출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달 여가 지나자 세계 밀 가격은 20-50% 상승했다.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60%까지 급등했다. 이로 인해 80-90%의 밀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던 국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 국가 중에는 빈곤국이 많았다. 국제사회의 지원에 의존하던 무력 분쟁 중인 국가들이 입은 타격 또한 컸다. 밀 가격 인상은 국제구호단체들이 확보할 수 있는 물량의 감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식용유 가격도 급등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해바라기유 공급의 46%를, 러시아는 23%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유 공급 차질 여파로 국제시장의 모든 식용유 가격이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또한 상승했다. 이 모든 가격 상승의 결과는 세계인의 생활고 및 빈곤의 심화였다.
전쟁이 세계인, 특히 빈곤국과 빈자들의 일상을 넘어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자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들과 빈곤국들은 전쟁 종식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제대로 응징해야 향후 유사한 무력 충돌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했고 무기가 부족해지자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까지 우회적으로 무기를 확보해 공급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 군인들의 피해는 피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좋은 방패막이로 이용했다. 우크라이나는 침공받은 국가로서 전쟁을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전쟁은 언젠가 반드시 끝내야 하고, 종전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도 미국도 종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은 전쟁 직후였던 2022년 3월 이후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
전쟁 영향의 세계화를 가장 흔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난민 발생이다. 세계가 전쟁과 난민 문제에 민감해진 계기는 시리아 난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왜곡된 면이 있었다. 난민 문제가 국제 뉴스가 된 이유는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 국가들의 ‘골칫거리’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해서가 아니었다.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는 국가는 무력 분쟁이 발생한 국가의 이웃 국가들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중위와 하위 수준 국가들이 대부분의 난민과 이주민을 수용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2023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이들 국가가 수용하는 난민과 이주민은 전체의 76%에 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약 8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그들 대부분이 주변 유럽 국가들에 머물고 있었지만 전체 통계는 별 변화가 없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난민 수용 1위 국가는 튀르키예고 2위는 이란이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과 이주민은 수용국에게 심각한 사회적 압력이 되고 사회갈등을 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난민 수용이 아니라 난민 귀환이다. 난민과 이주민 수용 및 보호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의 본국 귀환이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으로 난민 및 이주민 귀환율은 매우 낮다. 2022년에 귀환한 난민 및 이주민은 약 600만 명이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 및 이주민이 약 1억 840만 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주 적은 숫자다. 전 세계 난민 및 이주민 중 가장 많은 수는 시리아 출신이고, 두 번째는 우크라이나, 세 번째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전체 중 약 52%를 차지했다. 모두 전쟁으로 자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통계 수집 시점에서 1년 이상이 지난 현재 상황을 봐도 이들이 언제 귀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많은 수가 평생 타국에서 뿌리뽑힌 채 살아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이들이 평생 삶의 질이 낮은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경제, 난민 문제와 함께 전쟁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는 안전의 위협이다. 전쟁의 파괴성, 그리고 전쟁이 야기하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위기는 전쟁 중인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인의 안전을 위협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 군비 경쟁 심화와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국제사회의 분열과 진영화를 야기했다. 가자지구 전쟁은 무력 분쟁과 정치적 대결로 불안한 중동지역에 전쟁의 위험을 높였다. 세계 곳곳의 내전과 지역 및 세계 강대국의 개입은 세계 곳곳을 화약고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가 전 세계인의 안전과 일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말로 전쟁이 인간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계속 더 위험한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국제사회와 세계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전쟁이 야기하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기후변화를 악화하는 대규모 탄소 발생이다. 지난 1월 우크라이나의 루비브 폴리테크닉 국립대학교(Luviv Polytechnic National University)와 폴란드의 WBS대학교(WBS University)가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18개월 동안 전쟁으로 발생된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헝가리 등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보다 많았다. 온실가스는 미사일 발사와 폭발, 군용 차량의 석유 제품 사용, 석유 저장소의 화재, 건물 및 산업 기반 시설의 화재, 숲과 농경지의 화재, 목조 건축물 파괴 등에 의해 발생했다. 가자지구 전쟁도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했다. 지난 1월 사회과학연구네트워크(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자지구 전쟁 60일 동안의 탄소 배출량은 75개의 화력발전소에서 일 년 동안 15만 톤의 석탄을 연소시켰을 때 발생한 양과 같았다. 이는 기후변화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20개 국가의 연간 총배출량을 초과한 양이었다. 가자지구 전쟁 탄소 배출의 99%는 이스라엘의 공중 폭격과 지상 작전에서 발생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 사이 전쟁이든 국가 내 전쟁이든 한 곳의 전쟁은 더는 한 국가, 또는 지역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한 곳의 전쟁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세계는 한 국가의 전쟁, 또는 지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지리적 거리와 국익을 고려하며 전쟁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쟁 담론의 확산
전쟁은 항상 윤리적 문제를 동반한다. 전쟁에서 인간이 인간을 살상하는 일은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심지어 영웅적인 일로 찬양된다. 적국의 국민을 살상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여겨진다. 전쟁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인간성의 유지, 타자의 생명과 삶의 존중 같은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적 책임 등을 외면할 핑계가 된다. 그런 핑계를 합리화하는 것이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담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초기부터 정당한 전쟁 담론이 대두됐다. 전쟁 당사국들은 물론 국제사회와 세계인들도 전쟁을 지지 또는 반대할 근거를 찾았다. 내전과 달리 국가 사이 전쟁은 전쟁의 정당성 여부가 국제사회 여론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자지구 전쟁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정권 사이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국가 사이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전쟁 담론은 국제사회 여론을 좌우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 담론의 토대가 되는 건 정당한 전쟁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전쟁의 정당성(jus ad belleum, justice of war)’과 ‘전쟁에서의 정당성(jus in bello, justice in war)’으로 구성된다. 전쟁의 정당성은 국가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느냐로 우선적 근거가 되는 건 침략의 존재 여부다. 침략을 받은 국가는 공동체와 국민을 보호하고 영토를 방어할 권리가 있으므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전쟁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전쟁을 통한 문제 해결이 전쟁을 하지 않고 해결할 때보다 적은 피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건 ‘비례성’의 원칙이다. 비례성 판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 피해가 전투원의 피해보다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주진 지음.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pp.49-53.). 민간인 피해에는 인명 피해는 물론 사회 파괴도 포함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공격을,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을 받았고 두 국가 모두 공동체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의 개시라는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정당한 전쟁 이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세계인은 두 전쟁이 정당하게 시작됐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쟁의 정당성이 확보됨에 따라 전쟁 담론은 빠르게 확산됐고 두 국가에 대한 지지 여론도 높아졌다. 전쟁 담론의 주를 이룬 건 공격을 받은 국가는 당연히 무력을 써 방어 내지 보복을 할 수 있고, 향후 안전을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세계인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의 선택을 지지했고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고 전쟁이 ‘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 담론은 확산됐고 반면에 반전 담론은 소수의 의견에 머무르며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쟁 담론은 자연스럽게 전쟁에서의 정당성 문제로 옮겨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국제사회와 세계인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감시했고 러시아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견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이견이 형성됐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1,139명이 사망하고 240명 이상이 하마스의 인질이 된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통해 이스라엘은 시시각각 가자지구 곳곳을 초토화시켰고 단시간에 기록적인 사상자를 냈다. 비례성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 명분을 내세우며 대규모 민간인 살상과 병원, 학교, 빵가게, 피란 캠프 등 전쟁 중에도 보호되어야 하는 시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스라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약 85%가 이주민이 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와 통제로 구호품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물, 식품, 의약품, 전기 부족에 시달리며 매일 생존 전쟁을 치렀다. 다른 전쟁에서라면 이들 대부분이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지구 주민들은 지옥 안에 갇혀버렸다. 이스라엘의 경고에 따라 가자지구 북부에서 남부로, 그리고 남부에서 중부와 북부로 이동했지만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을 핑계로 막대한 인명 피해와 인도주의 재난을 야기했지만 하마스에 얼마나 타격을 줬는지, 얼마나 많은 하마스 대원과 무장 세력을 제거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쟁 내내 중대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에 대한 국제사회와 세계인의 판단은 엇갈렸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두둔했다. 이스라엘의 보복이 입은 피해 수준을 수십 배 초과했음에도 정당하다고 비호했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한 군사적 행위도 향후 공격을 막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많은 세계인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유엔과 국제인권단체들의 강도 높은 비난을 오히려 비난했다.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 대한 묵인 및 승인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에 대한 판단과는 달랐다. 이는 전쟁 담론이 무력 사용과 전쟁 자체에 얼마나 관대하고 다른 한편 허술한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 담론에 초점을 맞추면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공격받은 국가로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관련해서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이, 그리고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국민을 위해 국가가 할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었다. 전쟁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 하고, 불가피하게 시작했다면 단시일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하면서 승리가 불확실한 전쟁에 계속 매달렸다. 다른 한편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 내지 방치했다. 그것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불확실한데도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쟁 담론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과 관련해 깊게 성찰되고 논의되었어야 했다.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현재 사는 21세기는 전쟁의 시대다. 전쟁이 억제됐던 냉전 시대가 종식된 후 세계는 많은 전쟁을 목도했고 대부분의 전쟁은 내전이었다. 그런데 21세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가 사이 전쟁이 다시 발생했다. 그 시작은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이었고 이라크 전쟁이 뒤를 이었다. 다른 한편 세계 곳곳의 내전에 강대국과 주변 국가가 개입하면서 국제전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2021년 8월에 20년 동안 계속됐던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끝났고,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아프간 전쟁의 시작과 함께 세계는 미국의 부당한 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당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재연됐다. 아프간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진 파급력과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거기에 더해 2023년 10월 가자지구 전쟁이 시작됐고 중동지역은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폐해가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전쟁 담론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전쟁 담론이 계속 힘을 발휘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의 전쟁과 무력 사용은 항상 옳으며 국가가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건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전쟁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동시에 국가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점도 말해준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그렇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 국가가 선포하는 전쟁의 가장 큰 문제는 권한을 가진 소수의 결정이라는 점이다. 국민은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때로 국민의 의견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종전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국민은 생명의 손실과 삶의 파괴를 경험하며 종전을 원하지만 전쟁 중에도 상대적으로 편안한 삶을 유지하는 정치인들과 군 수뇌부는 패전이 짙은 상황에서도 승리를 장담하며 종전 노력을 하지 않는다. 최악은 통치자와 정치인들, 그리고 군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쟁을 악용한다는 점이다.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이 모두 그렇다. 국가가, 다른 말로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을 시작하고 계속한다는 건 대체로 거짓이다.
전쟁 담론에서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점은 전쟁에서의 정당성이 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이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국가의 전쟁에서는 민간인 보호와 피해의 최소화로 무력 사용의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전쟁은 없다. 보통 민간인 사망자는 군인 사망자보다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 많다. 이는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을 통해 세계가 목도하고 통계가 확인한 사실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현대전에서는 첨단 무기와 정밀 타격 기술의 향상으로 오폭이 거의 없고 그 결과 민간인 인명 피해는 최소한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명 피해조차 문제가 되지만 전쟁 담론은 이를 전투 중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피해를 말하는 이중 효과(double effect)의 논리로 쉽게 정당화한다 (정주진 지음.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p.5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쟁 범죄다.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다.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당사국의 전쟁 범죄는 쉽게 무마되고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전쟁 담론은 승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지고 열심히 싸운 국가와 국민은 승리라는 보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된다. 인명 피해와 사회 파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처절한 상황에 인과응보와 심리적 위안을 적용하는 매우 이질적이고 부적절한 논리지만 전쟁 담론은 그렇게 전쟁을 묵인하고 다른 한편 부추긴다. 전쟁으로 발생하는 많은 난민과 이주민, 사회기반 시설의 파괴, 전쟁 범죄, 불안한 생활의 지속은 승리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치부된다. 국가의 전쟁은 옳고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이런 전쟁 담론을 강화한다.
세계적으로 전쟁 담론이 계속 확산하고 있다. 그 결과 무기 거래가 증가하고 무력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무기 거래가 증가했다. 그 결과 2023년 미국의 무기 및 방위 관련 거래는 2022년에 비해 55.9%나 급증했다. 이는 사상 최고 기록이다 (US Department of State. Fact Sheet: Fiscal Year 2023 US Arms Transfers and Defense Trade. January 29, 2024.). 2023년 독일의 무기 수출 또한 기록을 갱신했다 (Defense News. German weapons exports reached record high in 2023. January 2, 2024.).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 고착되고 전쟁 담론이 사회적으로 팽배한 한국 또한 무기 수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국가 중 하나다. 한국은 2013-2017년 기간에 비해 2018-2022년 기간 동안 무기 수입이 61%나 증가했다 (SIPRI(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rach Institute). Fact sheet: Trends in international arms transfers, 2022. March 2023.).
전쟁 담론의 핵심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의 불가피성, 나아가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진행 중인 전쟁의 구체적인 피해를 외면하고 종식 노력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전쟁을 쉽게 승인하고 지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을 간과하고 동시에 여러 전쟁을 통해 세계가 반복적으로 경험한 막대한 인명 및 사회 피해를 외면한다.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외면하고 외교가 아닌 군사적 접근을 쉽게 허용한다.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국가의 군사작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무력 사용과 전쟁을 쉽게 허용하는 전쟁 담론은 국가 사이, 공동체 사이 무력 대결을 심화시키고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 전쟁 범죄에 대한 감시와 단죄를 어렵게 한다. 이런 허술하고 편향적이고 위험한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야 전쟁의 시대에 전쟁이 아닌 평화적 공존을 상상할 수 있다. 전쟁의 정당화와 무력이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쟁은 우리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 중 하나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우선적인 노력은 전쟁 담론의 왜곡된 허상을 이해하고 평화와 공존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담론의 개발과 확산은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동시에 영역들의 교류를 통해 통합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 위 글은 2024년 5월 16일 2024 광주민주포럼의 '우리가 바라는 미래: 우리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 세션에서 발제한 것으로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전쟁의 시대
본 발제문을 쓰고 있는 2024년 3월 초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째에 접어들었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은 6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1년 이상 답보상태였고 가자지구 전쟁은 5개월 내내 이스라엘의 일방적 공격과 가자지구 초토화 작전이 주를 이뤘다. 두 개의 전쟁은 여러 가지를 시사해주었다. 가장 주목할 건 전 세계가 두 개의 전쟁을 통해 전쟁 자체에, 그리고 전쟁의 정당성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점은 전쟁 상황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전쟁이 야기하는 인명 피해와 사회 파괴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전쟁이 야기하는 인도주의 재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높아졌다. 그런데 가장 주목할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전쟁을 종식하지도, 인도주의적 재난을 막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이스라엘의 집단학살(genocide)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았다. 지난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ICJ)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집단학살 혐의로 제소한 사건을 심리한 후 사실상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혐의를 인정하고 이를 예방할 임시조치(provisional measures)를 명령하면서 1개월 안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상대로 무차별 공격과 집단학살을 중단하지 않았고 보고서도 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ICJ가 휴전을 명령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국제사회는, 그리고 세계시민 사회는 이스라엘을 중단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신속하게 이뤄졌으나 결과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사망자는 전쟁 발생 거의 2주년이 되는 2024년 2월 15일 현재 1만 582명이었다. 여기에는 587명 어린이 사망자가 포함됐다. 부상자는 1만 9,875명이었고 이중 어린이는 1,298명이었다. 전쟁 후 약 1년이 지난 시점인 2023년 1월 말 현재 우크라이나 난민은 약 800만명이었다. 전쟁이 3년째에 접어든 2024년 3월 초 현재 여전히 약 648만명이 국외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었다. 가자지구 전쟁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전쟁 시작 후 5개월이 지난 2024년 3월 10월 현재 가자지구 주민 사망자는 3만 960명이었고 부상자는 7만 2,524명이었다. 사망자 중 약 70%가 어린이와 여성이었다. 이스라엘 사망자는 10월 7일 하마스 공격으로 인해 발생한 1,139명이 유지됐고 100명 이상의 인질이 가자지구에 억류되어 있었다.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전쟁 중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이스라엘의 봉쇄로 국외 난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230만 명의 주민 중 약 85%가 이주민이 됐다. 특히 이스라엘의 봉쇄와 구호품 지원 통제로 가자지구는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 상황에 직면했다. 2월 중순부터 유엔과 구호단체들은 굶주림에 의한 대량 사망자 발생을 우려했고 2월 말이 되자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자 발생, 특히 어린이 사망자 발생은 현실이 됐다. 사상자에 더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모두 심각한 사회 파괴가 발생했다. 복구에는 향후 수십 년이 걸릴 전망이고 가자지구의 경우 복구가 가능한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은 다른 면에서 세계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시사했다. 그것은 두 전쟁 모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위한 대리전을 했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로 집단학살을 저지르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했다. 그 기저에는 중동과 유럽에서 패권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 미국과의 정치적.군사적 협력을 유지하고 국익을 챙기려는 유럽 국가들의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는 전 세계 정치.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을 야기한 두 개의 전쟁이 미국과 그에 협력하는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됐음을 말해준다. 또한 세계가 이런 국가들의 이익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봤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많은 사람이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고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만 진행 중인 건 아니다. 예멘, 소말리아, 시리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내전이 진행 중이다. 국가 사이 전쟁이 아닌 내전은 국내 문제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지만 인명 피해와 인도주의 재난 수준은 국가 사이 전쟁보다 전혀 덜하지 않다. 또한 대부분의 내전에는 소위 세계 및 지역 강대국들의 이권이 얽혀 있고 그런 이유로 타국의 노골적인 무력 개입이 이뤄지곤 한다. 세계는 최악의 인도주의 재난과 난민 사태가 야기되기 전까지는, 명확히는 그런 상황이 영상 뉴스로 전해지기 전까지는 내전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세계는 전쟁으로 전쟁을 지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개의 전쟁이 시사하는 또 다른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세계 곳곳의 내전은 잊혀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잊혀졌다. 전쟁과 관련해 드러난 국제사회와 세계인의 민낯이다.
전쟁 영향의 세계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인은 세계화 시대에 전쟁이 절대 국지적인 사건이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이전에 시리아 내전이 야기한 난민 문제가 세계에 무거운 고민을 던지기는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만큼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인의 일상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가장 즉각적이고 심각했던 건 곡물 가격의 급상승이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당장 밀 수출에 차질을 빚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을 막았고, 국제사회의 제재로 러시아는 밀 수출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달 여가 지나자 세계 밀 가격은 20-50% 상승했다.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60%까지 급등했다. 이로 인해 80-90%의 밀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던 국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 국가 중에는 빈곤국이 많았다. 국제사회의 지원에 의존하던 무력 분쟁 중인 국가들이 입은 타격 또한 컸다. 밀 가격 인상은 국제구호단체들이 확보할 수 있는 물량의 감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식용유 가격도 급등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해바라기유 공급의 46%를, 러시아는 23%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유 공급 차질 여파로 국제시장의 모든 식용유 가격이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또한 상승했다. 이 모든 가격 상승의 결과는 세계인의 생활고 및 빈곤의 심화였다.
전쟁이 세계인, 특히 빈곤국과 빈자들의 일상을 넘어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자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들과 빈곤국들은 전쟁 종식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제대로 응징해야 향후 유사한 무력 충돌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했고 무기가 부족해지자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까지 우회적으로 무기를 확보해 공급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 군인들의 피해는 피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좋은 방패막이로 이용했다. 우크라이나는 침공받은 국가로서 전쟁을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전쟁은 언젠가 반드시 끝내야 하고, 종전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도 미국도 종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은 전쟁 직후였던 2022년 3월 이후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
전쟁 영향의 세계화를 가장 흔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난민 발생이다. 세계가 전쟁과 난민 문제에 민감해진 계기는 시리아 난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왜곡된 면이 있었다. 난민 문제가 국제 뉴스가 된 이유는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 국가들의 ‘골칫거리’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해서가 아니었다.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는 국가는 무력 분쟁이 발생한 국가의 이웃 국가들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중위와 하위 수준 국가들이 대부분의 난민과 이주민을 수용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2023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이들 국가가 수용하는 난민과 이주민은 전체의 76%에 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약 8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그들 대부분이 주변 유럽 국가들에 머물고 있었지만 전체 통계는 별 변화가 없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난민 수용 1위 국가는 튀르키예고 2위는 이란이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과 이주민은 수용국에게 심각한 사회적 압력이 되고 사회갈등을 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난민 수용이 아니라 난민 귀환이다. 난민과 이주민 수용 및 보호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의 본국 귀환이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으로 난민 및 이주민 귀환율은 매우 낮다. 2022년에 귀환한 난민 및 이주민은 약 600만 명이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 및 이주민이 약 1억 840만 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주 적은 숫자다. 전 세계 난민 및 이주민 중 가장 많은 수는 시리아 출신이고, 두 번째는 우크라이나, 세 번째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전체 중 약 52%를 차지했다. 모두 전쟁으로 자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통계 수집 시점에서 1년 이상이 지난 현재 상황을 봐도 이들이 언제 귀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많은 수가 평생 타국에서 뿌리뽑힌 채 살아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이들이 평생 삶의 질이 낮은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경제, 난민 문제와 함께 전쟁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는 안전의 위협이다. 전쟁의 파괴성, 그리고 전쟁이 야기하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위기는 전쟁 중인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인의 안전을 위협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 군비 경쟁 심화와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국제사회의 분열과 진영화를 야기했다. 가자지구 전쟁은 무력 분쟁과 정치적 대결로 불안한 중동지역에 전쟁의 위험을 높였다. 세계 곳곳의 내전과 지역 및 세계 강대국의 개입은 세계 곳곳을 화약고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가 전 세계인의 안전과 일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말로 전쟁이 인간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계속 더 위험한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국제사회와 세계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전쟁이 야기하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기후변화를 악화하는 대규모 탄소 발생이다. 지난 1월 우크라이나의 루비브 폴리테크닉 국립대학교(Luviv Polytechnic National University)와 폴란드의 WBS대학교(WBS University)가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18개월 동안 전쟁으로 발생된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헝가리 등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보다 많았다. 온실가스는 미사일 발사와 폭발, 군용 차량의 석유 제품 사용, 석유 저장소의 화재, 건물 및 산업 기반 시설의 화재, 숲과 농경지의 화재, 목조 건축물 파괴 등에 의해 발생했다. 가자지구 전쟁도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했다. 지난 1월 사회과학연구네트워크(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자지구 전쟁 60일 동안의 탄소 배출량은 75개의 화력발전소에서 일 년 동안 15만 톤의 석탄을 연소시켰을 때 발생한 양과 같았다. 이는 기후변화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20개 국가의 연간 총배출량을 초과한 양이었다. 가자지구 전쟁 탄소 배출의 99%는 이스라엘의 공중 폭격과 지상 작전에서 발생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 사이 전쟁이든 국가 내 전쟁이든 한 곳의 전쟁은 더는 한 국가, 또는 지역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한 곳의 전쟁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세계는 한 국가의 전쟁, 또는 지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지리적 거리와 국익을 고려하며 전쟁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쟁 담론의 확산
전쟁은 항상 윤리적 문제를 동반한다. 전쟁에서 인간이 인간을 살상하는 일은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심지어 영웅적인 일로 찬양된다. 적국의 국민을 살상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여겨진다. 전쟁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인간성의 유지, 타자의 생명과 삶의 존중 같은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적 책임 등을 외면할 핑계가 된다. 그런 핑계를 합리화하는 것이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담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의 경우 초기부터 정당한 전쟁 담론이 대두됐다. 전쟁 당사국들은 물론 국제사회와 세계인들도 전쟁을 지지 또는 반대할 근거를 찾았다. 내전과 달리 국가 사이 전쟁은 전쟁의 정당성 여부가 국제사회 여론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자지구 전쟁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정권 사이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국가 사이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전쟁 담론은 국제사회 여론을 좌우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 담론의 토대가 되는 건 정당한 전쟁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전쟁의 정당성(jus ad belleum, justice of war)’과 ‘전쟁에서의 정당성(jus in bello, justice in war)’으로 구성된다. 전쟁의 정당성은 국가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느냐로 우선적 근거가 되는 건 침략의 존재 여부다. 침략을 받은 국가는 공동체와 국민을 보호하고 영토를 방어할 권리가 있으므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전쟁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전쟁을 통한 문제 해결이 전쟁을 하지 않고 해결할 때보다 적은 피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건 ‘비례성’의 원칙이다. 비례성 판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 피해가 전투원의 피해보다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주진 지음.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pp.49-53.). 민간인 피해에는 인명 피해는 물론 사회 파괴도 포함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공격을,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을 받았고 두 국가 모두 공동체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의 개시라는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정당한 전쟁 이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세계인은 두 전쟁이 정당하게 시작됐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쟁의 정당성이 확보됨에 따라 전쟁 담론은 빠르게 확산됐고 두 국가에 대한 지지 여론도 높아졌다. 전쟁 담론의 주를 이룬 건 공격을 받은 국가는 당연히 무력을 써 방어 내지 보복을 할 수 있고, 향후 안전을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세계인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의 선택을 지지했고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고 전쟁이 ‘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 담론은 확산됐고 반면에 반전 담론은 소수의 의견에 머무르며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쟁 담론은 자연스럽게 전쟁에서의 정당성 문제로 옮겨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국제사회와 세계인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감시했고 러시아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견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이견이 형성됐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1,139명이 사망하고 240명 이상이 하마스의 인질이 된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통해 이스라엘은 시시각각 가자지구 곳곳을 초토화시켰고 단시간에 기록적인 사상자를 냈다. 비례성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 명분을 내세우며 대규모 민간인 살상과 병원, 학교, 빵가게, 피란 캠프 등 전쟁 중에도 보호되어야 하는 시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스라엘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약 85%가 이주민이 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와 통제로 구호품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물, 식품, 의약품, 전기 부족에 시달리며 매일 생존 전쟁을 치렀다. 다른 전쟁에서라면 이들 대부분이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지구 주민들은 지옥 안에 갇혀버렸다. 이스라엘의 경고에 따라 가자지구 북부에서 남부로, 그리고 남부에서 중부와 북부로 이동했지만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을 핑계로 막대한 인명 피해와 인도주의 재난을 야기했지만 하마스에 얼마나 타격을 줬는지, 얼마나 많은 하마스 대원과 무장 세력을 제거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쟁 내내 중대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에 대한 국제사회와 세계인의 판단은 엇갈렸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두둔했다. 이스라엘의 보복이 입은 피해 수준을 수십 배 초과했음에도 정당하다고 비호했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한 군사적 행위도 향후 공격을 막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많은 세계인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유엔과 국제인권단체들의 강도 높은 비난을 오히려 비난했다.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 대한 묵인 및 승인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에 대한 판단과는 달랐다. 이는 전쟁 담론이 무력 사용과 전쟁 자체에 얼마나 관대하고 다른 한편 허술한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 담론에 초점을 맞추면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공격받은 국가로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관련해서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이, 그리고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국민을 위해 국가가 할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었다. 전쟁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 하고, 불가피하게 시작했다면 단시일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하면서 승리가 불확실한 전쟁에 계속 매달렸다. 다른 한편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 내지 방치했다. 그것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불확실한데도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쟁 담론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과 관련해 깊게 성찰되고 논의되었어야 했다.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현재 사는 21세기는 전쟁의 시대다. 전쟁이 억제됐던 냉전 시대가 종식된 후 세계는 많은 전쟁을 목도했고 대부분의 전쟁은 내전이었다. 그런데 21세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가 사이 전쟁이 다시 발생했다. 그 시작은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이었고 이라크 전쟁이 뒤를 이었다. 다른 한편 세계 곳곳의 내전에 강대국과 주변 국가가 개입하면서 국제전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2021년 8월에 20년 동안 계속됐던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끝났고,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아프간 전쟁의 시작과 함께 세계는 미국의 부당한 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당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재연됐다. 아프간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진 파급력과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거기에 더해 2023년 10월 가자지구 전쟁이 시작됐고 중동지역은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폐해가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전쟁 담론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전쟁 담론이 계속 힘을 발휘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의 전쟁과 무력 사용은 항상 옳으며 국가가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건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전쟁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동시에 국가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점도 말해준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그렇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 국가가 선포하는 전쟁의 가장 큰 문제는 권한을 가진 소수의 결정이라는 점이다. 국민은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때로 국민의 의견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종전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국민은 생명의 손실과 삶의 파괴를 경험하며 종전을 원하지만 전쟁 중에도 상대적으로 편안한 삶을 유지하는 정치인들과 군 수뇌부는 패전이 짙은 상황에서도 승리를 장담하며 종전 노력을 하지 않는다. 최악은 통치자와 정치인들, 그리고 군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쟁을 악용한다는 점이다.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이 모두 그렇다. 국가가, 다른 말로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을 시작하고 계속한다는 건 대체로 거짓이다.
전쟁 담론에서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점은 전쟁에서의 정당성이 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이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국가의 전쟁에서는 민간인 보호와 피해의 최소화로 무력 사용의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전쟁은 없다. 보통 민간인 사망자는 군인 사망자보다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 많다. 이는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을 통해 세계가 목도하고 통계가 확인한 사실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현대전에서는 첨단 무기와 정밀 타격 기술의 향상으로 오폭이 거의 없고 그 결과 민간인 인명 피해는 최소한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명 피해조차 문제가 되지만 전쟁 담론은 이를 전투 중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피해를 말하는 이중 효과(double effect)의 논리로 쉽게 정당화한다 (정주진 지음.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p.5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쟁 범죄다.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다.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진 당사국의 전쟁 범죄는 쉽게 무마되고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전쟁 담론은 승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당한 전쟁의 명분을 가지고 열심히 싸운 국가와 국민은 승리라는 보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된다. 인명 피해와 사회 파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처절한 상황에 인과응보와 심리적 위안을 적용하는 매우 이질적이고 부적절한 논리지만 전쟁 담론은 그렇게 전쟁을 묵인하고 다른 한편 부추긴다. 전쟁으로 발생하는 많은 난민과 이주민, 사회기반 시설의 파괴, 전쟁 범죄, 불안한 생활의 지속은 승리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치부된다. 국가의 전쟁은 옳고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이런 전쟁 담론을 강화한다.
세계적으로 전쟁 담론이 계속 확산하고 있다. 그 결과 무기 거래가 증가하고 무력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무기 거래가 증가했다. 그 결과 2023년 미국의 무기 및 방위 관련 거래는 2022년에 비해 55.9%나 급증했다. 이는 사상 최고 기록이다 (US Department of State. Fact Sheet: Fiscal Year 2023 US Arms Transfers and Defense Trade. January 29, 2024.). 2023년 독일의 무기 수출 또한 기록을 갱신했다 (Defense News. German weapons exports reached record high in 2023. January 2, 2024.).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 고착되고 전쟁 담론이 사회적으로 팽배한 한국 또한 무기 수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국가 중 하나다. 한국은 2013-2017년 기간에 비해 2018-2022년 기간 동안 무기 수입이 61%나 증가했다 (SIPRI(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rach Institute). Fact sheet: Trends in international arms transfers, 2022. March 2023.).
전쟁 담론의 핵심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의 불가피성, 나아가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진행 중인 전쟁의 구체적인 피해를 외면하고 종식 노력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전쟁을 쉽게 승인하고 지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을 간과하고 동시에 여러 전쟁을 통해 세계가 반복적으로 경험한 막대한 인명 및 사회 피해를 외면한다.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외면하고 외교가 아닌 군사적 접근을 쉽게 허용한다.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국가의 군사작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무력 사용과 전쟁을 쉽게 허용하는 전쟁 담론은 국가 사이, 공동체 사이 무력 대결을 심화시키고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 전쟁 범죄에 대한 감시와 단죄를 어렵게 한다. 이런 허술하고 편향적이고 위험한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야 전쟁의 시대에 전쟁이 아닌 평화적 공존을 상상할 수 있다. 전쟁의 정당화와 무력이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쟁은 우리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 중 하나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전쟁 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우선적인 노력은 전쟁 담론의 왜곡된 허상을 이해하고 평화와 공존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담론의 개발과 확산은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동시에 영역들의 교류를 통해 통합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 위 글은 2024년 5월 16일 2024 광주민주포럼의 '우리가 바라는 미래: 우리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 세션에서 발제한 것으로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