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위기의 교회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용어가 세계적, 그리고 국내적 상황의 언급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위기를 보면 먼저 코로나19에 의한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이 완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팬데믹에 직면할 가능성도 자주 언급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1년이 훨씬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고 세계는 미국,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갈라져 신냉전 구도가 본격화되는 모양새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쏟아붓고 있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은 작년 3월 이후 재개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피해, 난민 증가, 사회 파괴 등에 대한 뉴스는 거의 사라졌고 사실에 상관없이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응원하는 보도가 대부분이다. 기후변화는 이제 기후위기로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전 세계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동의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악화시킨 선진국들과 선도적 개발도상국들은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에도 빈번하게 피해를 입는 빈곤국과 작은 섬나라들에 대한 책임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된 식품과 에너지 가격 상승은 총체적 경제난으로 이어져 빈곤국과 빈곤층의 생존을 압박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은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국내적인 위기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받았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시작된 물가 및 금리 인상, 그리고 경기 침체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빈부 격차는 심해져서 한국은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다. 대화, 협상, 타협의 실종에서 비롯된 정치의 부작동은 국민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래에까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동시에 상반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대결과 증오는 갈수록 심해지고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 한미연합훈련 등의 무력 시위와 미국의 빈번한 전략자산 전개, 북한의 대응 무력 시위와 미사일 실험 등 강대강 대결의 지속으로 인해 무력 충돌이 우려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대결과 군사적 긴장 상황이 세계의 신냉전 구도 형성, 국내 총선 등과 맞물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언사를 드러내면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정부와 여당을 제어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한.미.일 안보 협력에 집착하면서 중국에 거리를 두는 정부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남북문제의 악화는 물론 경제 문제에까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세계적, 국내적 위기의 시대에 한국교회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위기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건 신자 숫자의 감소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국교회는 분명 위기다. 최근 발표된 한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15.0%로 1998년의 20.7%에서 크게 감소했다. 그중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이른바 ‘가나안’ 신자는 29.3%로 대폭 증가했다. 그런데 불교와 가톨릭 신자 또한 비슷한 비율로 감소했고 이것은 한국 사회에 탈종교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신자 숫자 감소는 한국교회의 위기라 볼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사회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초 한 개신교 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16.5%로 불교보다는 약간 높았고 가톨릭보다는 낮았다. 또한 기독교 목사, 그리고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물음에 ‘전혀 또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답한 비율이 75% 정도였다. 이런 불신은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또 다른 위기는 세계적, 국내적 위기의 시대에 대응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교회는 여전히 신자들에게 현실 도피처를 제공하고 개인적 성공을 축복하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회는 세계 및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면서 더불어 사는 역량을 갖춘 신자를 키우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 내에 평화적 공존 실현에 기여할 인적 자원이 없음을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교회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평화적 공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이점 또한 한국교회가 깊이 성찰해야 할 위기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한계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건 평화적 공존의 가치와 실현이다. 세계가, 그리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계속 악화되는 이유는 모두의 평화적 공존을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하는 개인이나 집단보다 자기가 속한 국가나 집단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는 자기 이익 추구와 각자도생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주장 또한 만연해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그런 배타적인 접근으로는 자기 안전도 지킬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것이고 위기를 극복할 가치와 방향은 결국 평화적 공존이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행동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보편적 가치와 기준의 수용에 소극적이고, 이를 성서와 연결해 교회 안에서 성찰하는 데도 게으르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자신의 종교적 테두리 안에만 머물면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하고 다른 한편 배타적인 인식과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선’은 교회만의 것으로 사회적 인정과 신뢰를 얻지도, 평화적 공존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대다수 교회가 배타성으로 인류 보편적인 평화적 공존 가치를 외면하고 있으나 일부 교회는 1980년대부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의미 있는 행보를 계속해오고 있다. 1985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그리고 1988년 2월 19일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일명 88선언)’을 채택했다. 평화가 사회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고 통일에 대한 평화적 접근이 구체적이지 않던 때에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 체제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평화적 통일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한반도 평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평화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이 여전히 평화통일 현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적, 국내적 다양한 평화 현안을 다루지 않고 있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회가 개입하는 국제 문제는 일시적인 구호 활동 모금이나 선교 차원의 개발도상국 및 빈곤국 현장 사업이 대부분이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세계 평화 현안은 거의 없다. ‘정의.평화’ 주제하에서 다양한 한국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문제 제기와 정의 실현에 맞춰져 있다. 정의 실현은 평화 실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정의와 함께 평화적 문제해결과 화해까지 염두에 둔 접근이 필요하다. 시편 85편에 기록된 것처럼 진실과 정의와 함께 사랑이 필요하고 평화가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의 실현은 대결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화적 공존으로의 진전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통합적이고 동시에 다층적인 접근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역량, 다시 말해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인적 자원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 이점은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질과 지속성을 방해한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첫 번째 한계는 소수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평화적 공존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을 목표로 하는 평화운동은 다수 교회 및 기독교인의 외면을 받고 있다. 교회는 ’사랑‘을 가장 중요한 성서의 가르침으로 여기지만 모두를 포함하고 모두와의 공존을 선택하는 평화의 가치와 실행은 배척한다. 교회 평화운동의 핵심 주제인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조차 북한에 대한 불신과 증오, 또는 정치적 입장을 우선하는 신자들로부터 외면받는다. 교회의 평화운동은 여전히 소수의, 특히 목회자 중심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한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 및 세계의 보편적 평화 현안을 다루지 않고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교회와 신자들은 세계와 국내 평화 현안으로 시야를 넓히고 교회 및 사회 변화를 위한 역량을 키우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평화 현안을 다룸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하고 이해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없다.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집중함에도 교회 내 진보 대 보수의 대립은 변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지도 않는다는 점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세 번째 한계는 교회 내에서 체계적인 평화교육을 실행하고 사회 변화에 기여하는 교회의 평화 담론과 역량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평화적 공존의 가치와 개념을 다수와 공유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평화교육은 평화의 가치를 수용하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태도를 기르고 실천을 모색하게 하는 체계적인 교육이다. 이런 평화교육은 사회 변화를 위한 역량을 만들고 기존 평화 담론의 발전과 새로운 평화 담론의 형성에 기여한다. 평화 실현을 위한 노력과 과정은 소수의 주도와 제안이 아닌 다수의 논의, 공감, 합의 등 평화적 방식에 기반해야 모두의 필요에 답할 수 있으며 평화교육은 그런 기본과 원칙을 가르치고 실행을 독려하는 교육이다. 이런 평화교육은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교회에도 필요하지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실행되는 교회 내 평화교육은 거의 없다. ‘평화’를 부르짖는 교회조차 평화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설교나 신앙교육이 곧 평화교육이라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 교회와 신자의 평화 역량은 키워지지 않고 교회의 평화 담론은 소수의 독점을 벗어나지 못하며 교회 평화운동은 여전히 다수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실행의 모색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포기할 수 없고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평화를 외면한다면 교회의 정체성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고 평화운동은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고민의 초점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평화구축(peacebuilding) 이론을 참고할 수 있다. 평화구축은 평화 실현을 위한 실행 영역이자 접근으로 폭력적 상황을 평화적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말한다. 평화구축의 핵심 원칙은 당사자 참여와 상향식(bottom-up) 접근이다. 평화의 실현은 소수의 노력이나 주창으로 불가능하고 집단과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열거한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원칙이다.
앞서 열거한 한계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두 개의 단어는 참여와 역량의 부족이다. 교회 평화운동이 확장성이 없고 보편적 평화 현안의 수용에 게으르고 새로운 평화 담론과 역량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다수의 참여와 상향식 접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를 높이고 역량을 키울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노력, 다시 말해 새로운 실행 방법이 필요하다.
먼저 평화통일 및 한반도 평화 문제를 다루고 교회 내 대결과 단절을 완화하기 위해 기독교 윤리의 토대 위에서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다양한 대화 자리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화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논쟁이 아니며 대화를 하는 이유는 서로 듣고 배우고 변화하기 위해서다. 대화는 각 교회와 교단 내, 그리고 교단 사이에서 이뤄질 수 있고 방식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대화와 숙의 프로그램을 참고할 수 있다. 대화의 규모에 따라 참여자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참여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참여 기회 확대를 위해 반복적인 운영이 필요하다. 대화 자리는 상이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참여자들이 서로의 견해를 청취 및 존중하고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조직 및 운영되어야 한다. 참여자들이 이념, 정치적 성향, 세대, 지역 등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태도와 행동에 기반해 성찰하고 공동의 토대와 담론을 만들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대화를 통해 각 교회 및 교단의 활동과 사업의 방향, 내용, 구체적 목표 등에 대한 합의를 만드는 시도도 필요하다. 각 교회와 교단 내, 그리고 교단 사이 입장과 이념 차이에서 비롯된 대결과 갈등을 끝내고 기독교인의 연대를 회복할 방안도 대화를 통해 모색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이념 대결과 단절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다양한 규모와 방식의 대화 경험을 통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견해차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결을 지양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새로운 평화 담론 또한 만들 수 있다. 대화를 통해 하향식(top-down) 접근과 결정을 지양하고 상향식 접근을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교회 평화운동의 확장성과 지속성이 담보될 수 있다.
세계와 국내의 평화적 공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평화교육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평화의 개념을 교육하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행동을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세계와 국내의 다양한 평화 현안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사회, 교회, 개인의 책임, 그리고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 평화교육을 통해 평화적 공존의 실현을 위한 교회의 역량이 키워질 수 있다. 평화교육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좋은 시민‘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책임 있는 사회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일부긴 하지만 교회와 기독교인이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폭력적 언행을 표출하고 집단 사이 대결을 부추기는 건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사회와 불화하고 교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다양한 집단과 개인의 평화적 공존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존재가 되고 있고 그로 인한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며 기독교 윤리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화교육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반평화적 태도 및 행동에 대한 성찰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평화교육에서 새롭고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평화 담론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교육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평화 역량 향상, 그리고 참여와 상향식 접근으로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교회 안에는 물론 사회에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남북 대결의 종식, 평화통일을 위한 한반도 평화, 남북 화해 담론 등을 한국 사회와 국제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보편적 평화 현안을 발굴하고 확산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고,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문제를 평화의 시각과 개념을 통해 다루지 못함으로써 이념 대결의 테두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기에 시대에 이제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벗어나 세계 및 한국 사회와 함께 평화적 공존의 실현을 위해 교회 내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평화 담론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런 변화를 통해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변화도 가능하다. 또한 교회 내 진보와 보수의 대결, 그리고 사회의 대결과 단절을 극복하고 위기의 시대를 넘어 평화적 공존을 실현할 공동의 비전을 만들고 실행력을 키울 수 있다.
* 위 글은 <기독교사상> 2023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주석은 생략되어 있으며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
위기의 시대, 위기의 교회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용어가 세계적, 그리고 국내적 상황의 언급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위기를 보면 먼저 코로나19에 의한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이 완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팬데믹에 직면할 가능성도 자주 언급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1년이 훨씬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고 세계는 미국,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갈라져 신냉전 구도가 본격화되는 모양새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쏟아붓고 있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은 작년 3월 이후 재개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피해, 난민 증가, 사회 파괴 등에 대한 뉴스는 거의 사라졌고 사실에 상관없이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응원하는 보도가 대부분이다. 기후변화는 이제 기후위기로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전 세계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동의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악화시킨 선진국들과 선도적 개발도상국들은 기후위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에도 빈번하게 피해를 입는 빈곤국과 작은 섬나라들에 대한 책임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된 식품과 에너지 가격 상승은 총체적 경제난으로 이어져 빈곤국과 빈곤층의 생존을 압박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은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국내적인 위기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받았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시작된 물가 및 금리 인상, 그리고 경기 침체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빈부 격차는 심해져서 한국은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다. 대화, 협상, 타협의 실종에서 비롯된 정치의 부작동은 국민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래에까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동시에 상반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대결과 증오는 갈수록 심해지고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 한미연합훈련 등의 무력 시위와 미국의 빈번한 전략자산 전개, 북한의 대응 무력 시위와 미사일 실험 등 강대강 대결의 지속으로 인해 무력 충돌이 우려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대결과 군사적 긴장 상황이 세계의 신냉전 구도 형성, 국내 총선 등과 맞물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언사를 드러내면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정부와 여당을 제어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한.미.일 안보 협력에 집착하면서 중국에 거리를 두는 정부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남북문제의 악화는 물론 경제 문제에까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세계적, 국내적 위기의 시대에 한국교회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위기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건 신자 숫자의 감소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국교회는 분명 위기다. 최근 발표된 한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15.0%로 1998년의 20.7%에서 크게 감소했다. 그중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이른바 ‘가나안’ 신자는 29.3%로 대폭 증가했다. 그런데 불교와 가톨릭 신자 또한 비슷한 비율로 감소했고 이것은 한국 사회에 탈종교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신자 숫자 감소는 한국교회의 위기라 볼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사회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초 한 개신교 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16.5%로 불교보다는 약간 높았고 가톨릭보다는 낮았다. 또한 기독교 목사, 그리고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물음에 ‘전혀 또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답한 비율이 75% 정도였다. 이런 불신은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또 다른 위기는 세계적, 국내적 위기의 시대에 대응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교회는 여전히 신자들에게 현실 도피처를 제공하고 개인적 성공을 축복하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회는 세계 및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면서 더불어 사는 역량을 갖춘 신자를 키우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 내에 평화적 공존 실현에 기여할 인적 자원이 없음을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교회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평화적 공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이점 또한 한국교회가 깊이 성찰해야 할 위기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한계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건 평화적 공존의 가치와 실현이다. 세계가, 그리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계속 악화되는 이유는 모두의 평화적 공존을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하는 개인이나 집단보다 자기가 속한 국가나 집단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는 자기 이익 추구와 각자도생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주장 또한 만연해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그런 배타적인 접근으로는 자기 안전도 지킬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것이고 위기를 극복할 가치와 방향은 결국 평화적 공존이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행동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보편적 가치와 기준의 수용에 소극적이고, 이를 성서와 연결해 교회 안에서 성찰하는 데도 게으르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자신의 종교적 테두리 안에만 머물면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하고 다른 한편 배타적인 인식과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선’은 교회만의 것으로 사회적 인정과 신뢰를 얻지도, 평화적 공존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대다수 교회가 배타성으로 인류 보편적인 평화적 공존 가치를 외면하고 있으나 일부 교회는 1980년대부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의미 있는 행보를 계속해오고 있다. 1985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제34차 총회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그리고 1988년 2월 19일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일명 88선언)’을 채택했다. 평화가 사회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고 통일에 대한 평화적 접근이 구체적이지 않던 때에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 체제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평화적 통일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한반도 평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평화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이 여전히 평화통일 현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적, 국내적 다양한 평화 현안을 다루지 않고 있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회가 개입하는 국제 문제는 일시적인 구호 활동 모금이나 선교 차원의 개발도상국 및 빈곤국 현장 사업이 대부분이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세계 평화 현안은 거의 없다. ‘정의.평화’ 주제하에서 다양한 한국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문제 제기와 정의 실현에 맞춰져 있다. 정의 실현은 평화 실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정의와 함께 평화적 문제해결과 화해까지 염두에 둔 접근이 필요하다. 시편 85편에 기록된 것처럼 진실과 정의와 함께 사랑이 필요하고 평화가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의 실현은 대결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화적 공존으로의 진전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통합적이고 동시에 다층적인 접근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역량, 다시 말해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인적 자원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 이점은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질과 지속성을 방해한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첫 번째 한계는 소수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평화적 공존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을 목표로 하는 평화운동은 다수 교회 및 기독교인의 외면을 받고 있다. 교회는 ’사랑‘을 가장 중요한 성서의 가르침으로 여기지만 모두를 포함하고 모두와의 공존을 선택하는 평화의 가치와 실행은 배척한다. 교회 평화운동의 핵심 주제인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조차 북한에 대한 불신과 증오, 또는 정치적 입장을 우선하는 신자들로부터 외면받는다. 교회의 평화운동은 여전히 소수의, 특히 목회자 중심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한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 및 세계의 보편적 평화 현안을 다루지 않고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교회와 신자들은 세계와 국내 평화 현안으로 시야를 넓히고 교회 및 사회 변화를 위한 역량을 키우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평화 현안을 다룸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하고 이해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없다.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집중함에도 교회 내 진보 대 보수의 대립은 변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지도 않는다는 점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세 번째 한계는 교회 내에서 체계적인 평화교육을 실행하고 사회 변화에 기여하는 교회의 평화 담론과 역량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평화적 공존의 가치와 개념을 다수와 공유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평화교육은 평화의 가치를 수용하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태도를 기르고 실천을 모색하게 하는 체계적인 교육이다. 이런 평화교육은 사회 변화를 위한 역량을 만들고 기존 평화 담론의 발전과 새로운 평화 담론의 형성에 기여한다. 평화 실현을 위한 노력과 과정은 소수의 주도와 제안이 아닌 다수의 논의, 공감, 합의 등 평화적 방식에 기반해야 모두의 필요에 답할 수 있으며 평화교육은 그런 기본과 원칙을 가르치고 실행을 독려하는 교육이다. 이런 평화교육은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교회에도 필요하지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실행되는 교회 내 평화교육은 거의 없다. ‘평화’를 부르짖는 교회조차 평화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설교나 신앙교육이 곧 평화교육이라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 교회와 신자의 평화 역량은 키워지지 않고 교회의 평화 담론은 소수의 독점을 벗어나지 못하며 교회 평화운동은 여전히 다수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실행의 모색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포기할 수 없고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평화를 외면한다면 교회의 정체성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고 평화운동은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고민의 초점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평화구축(peacebuilding) 이론을 참고할 수 있다. 평화구축은 평화 실현을 위한 실행 영역이자 접근으로 폭력적 상황을 평화적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말한다. 평화구축의 핵심 원칙은 당사자 참여와 상향식(bottom-up) 접근이다. 평화의 실현은 소수의 노력이나 주창으로 불가능하고 집단과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열거한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원칙이다.
앞서 열거한 한계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두 개의 단어는 참여와 역량의 부족이다. 교회 평화운동이 확장성이 없고 보편적 평화 현안의 수용에 게으르고 새로운 평화 담론과 역량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다수의 참여와 상향식 접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를 높이고 역량을 키울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노력, 다시 말해 새로운 실행 방법이 필요하다.
먼저 평화통일 및 한반도 평화 문제를 다루고 교회 내 대결과 단절을 완화하기 위해 기독교 윤리의 토대 위에서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다양한 대화 자리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화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논쟁이 아니며 대화를 하는 이유는 서로 듣고 배우고 변화하기 위해서다. 대화는 각 교회와 교단 내, 그리고 교단 사이에서 이뤄질 수 있고 방식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대화와 숙의 프로그램을 참고할 수 있다. 대화의 규모에 따라 참여자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참여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참여 기회 확대를 위해 반복적인 운영이 필요하다. 대화 자리는 상이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참여자들이 서로의 견해를 청취 및 존중하고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조직 및 운영되어야 한다. 참여자들이 이념, 정치적 성향, 세대, 지역 등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태도와 행동에 기반해 성찰하고 공동의 토대와 담론을 만들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대화를 통해 각 교회 및 교단의 활동과 사업의 방향, 내용, 구체적 목표 등에 대한 합의를 만드는 시도도 필요하다. 각 교회와 교단 내, 그리고 교단 사이 입장과 이념 차이에서 비롯된 대결과 갈등을 끝내고 기독교인의 연대를 회복할 방안도 대화를 통해 모색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이념 대결과 단절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다양한 규모와 방식의 대화 경험을 통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견해차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결을 지양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새로운 평화 담론 또한 만들 수 있다. 대화를 통해 하향식(top-down) 접근과 결정을 지양하고 상향식 접근을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교회 평화운동의 확장성과 지속성이 담보될 수 있다.
세계와 국내의 평화적 공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평화교육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평화의 개념을 교육하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행동을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세계와 국내의 다양한 평화 현안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사회, 교회, 개인의 책임, 그리고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 평화교육을 통해 평화적 공존의 실현을 위한 교회의 역량이 키워질 수 있다. 평화교육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좋은 시민‘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책임 있는 사회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일부긴 하지만 교회와 기독교인이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폭력적 언행을 표출하고 집단 사이 대결을 부추기는 건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사회와 불화하고 교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다양한 집단과 개인의 평화적 공존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존재가 되고 있고 그로 인한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며 기독교 윤리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화교육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반평화적 태도 및 행동에 대한 성찰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평화교육에서 새롭고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평화 담론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교육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평화 역량 향상, 그리고 참여와 상향식 접근으로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교회 안에는 물론 사회에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남북 대결의 종식, 평화통일을 위한 한반도 평화, 남북 화해 담론 등을 한국 사회와 국제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보편적 평화 현안을 발굴하고 확산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고,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문제를 평화의 시각과 개념을 통해 다루지 못함으로써 이념 대결의 테두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기에 시대에 이제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벗어나 세계 및 한국 사회와 함께 평화적 공존의 실현을 위해 교회 내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평화 담론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런 변화를 통해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변화도 가능하다. 또한 교회 내 진보와 보수의 대결, 그리고 사회의 대결과 단절을 극복하고 위기의 시대를 넘어 평화적 공존을 실현할 공동의 비전을 만들고 실행력을 키울 수 있다.
* 위 글은 <기독교사상> 2023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주석은 생략되어 있으며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