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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의 조직화와 평화학의 시작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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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의 본격적인 시작, 나아가 평화학의 등장에 전조가 된 건 국제관계학이었다. 첫 국제관계학 강의는 1919년 영국의 웨일즈대학(University College of Wales)에서 시작됐다. 평화연구가 전쟁 반대에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국제관계학 강의도 같은 정서에서 출발했다. 1차,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20-45년 사이 국제관계학과와 강의가 영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북미 대학에 개설됐다. 국제관계학은 연구를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평화를 촉진한다는 열망과 이상을 가지고 수립됐다. 하지만 국제관계학은 점차 국가의 역할과 국익에 초점을 맞추는 현실주의(realism)로 기울었다. 거기엔 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다. 평화에 대한 지속적인 열망을 통해 그런 공백을 메우려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조직적인 평화연구가 시작됐다.

 

국제관계학이 평화연구의 시작에 영향을 미쳤고 평화학이 국가 사이 전쟁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평화학을 국제관계학의 하부연구 분야 중 하나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평화학을 국제관계학의 연구 주제 중 갈등해결, 평화세우기(peacebuilding), 갈등해결을 위한 조정 같은 특정 주제 및 상황만 다루는 연구 영역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학은 차별적이고 독립적인 학문으로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국제관계학과 다르다. 하나는 국제관계학이 주로 국가와 엘리트 정치의 관점을 다루는 것과 달리 평화학은 풀뿌리 차원의 시각에서 폭력, 갈등, 전쟁, 평화의 문제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인권, 개발, 젠더, 사회 재건, 인도적 지원, 비정부기구 등과 관련된 주제와 현장의 문제를 다룬다. 같은 이유로 폭력을 야기하는 군사적, 제도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기존 패러다임의 교체를 통해 새롭게 사회를 설계하는 문제와 방식에 집중한다. 구조적 폭력, 소극적 평화, 적극적 평화 같은 개념도 특별히 기존의 지배적 담론에 도전하기 위해 활용된다.


초기 평화연구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이뤄졌고 당연히 다양한 학문을 참고했다. 자연과학, 의학, 심리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등에서 이뤄진 전쟁의 원인과 집단 갈등에 대한 연구가 평화연구의 시작에 기여했다. 개별적으로 전쟁을 연구하고 평화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전쟁의 이해, 원인, 비용, 피해, 예방 등을 연구하고 지속될 수 있는 평화를 만드는 문제가 하나의 학문으로 접근하기엔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인본주의와 이상적인 동기를 토대로 학문적 연구를 해야 하고 다양한 학제가 결합하는 접근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공유했다. 다양한 학문 분야 외에도 19세기 말부터 확산된 평화운동, 퀘이커와 메너나이트 등 평화교회의 전통,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 등도 무력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필요와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런 토대와 영감이 평화연구의 시작에도 기여했다.


평화연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평화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학자들의 탐구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이뤄졌고 그들은 평화학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피티림 소로킨(Pitirim Sorokin), 루이스 리차드슨(Lewis Richardson), 퀸시 라이트(Quincy Wright) 등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전쟁에 대해 연구했고 양적 연구를 통해 통계적 기반을 만들었다.

 

초기 평화연구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이뤄졌고 당연히 다양한 학문을 참고했다. 자연과학, 의학, 심리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등에서 이뤄진 전쟁의 원인과 집단 갈등에 대한 연구가 평화연구의 시작에 기여했다. 개별적으로 전쟁을 연구하고 평화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전쟁의 이해, 원인, 비용, 피해, 예방 등을 연구하고 지속될 수 있는 평화를 만드는 문제가 하나의 학문으로 접근하기엔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인본주의와 이상적인 동기를 토대로 학문적 연구를 해야 하고 다양한 학제가 결합하는 접근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공유했다. 다양한 학문 분야 외에도 19세기 말부터 확산된 평화운동, 퀘이커와 메너나이트 등 평화교회의 전통,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 등도 무력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필요와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런 토대와 영감이 평화연구의 시작에도 기여했다.


평화연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평화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학자들의 탐구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이뤄졌고 그들은 평화학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피티림 소로킨(Pitirim Sorokin), 루이스 리차드슨(Lewis Richardson), 퀸시 라이트(Quincy Wright) 등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전쟁에 대해 연구했고 양적 연구를 통해 통계적 기반을 만들었다.

 

케네스 볼딩은 수학자이자 생물학자인 아나톨 라포포트, 심리학자인 허버트 켈만, 사회학자인 로버트 쿨리 안겔(Robert Cooley Angell)을 포함해 평화에 관심 있는 학자들과 함께 연구기관인 <갈등해결 연구 센터(Center for Research on Conflict Resolution)>를 만들었다. 케네스 볼딩은 개인적 연구를 통해 전쟁 예방에 초점을 맞췄고 특히 전쟁을 예방하지 못하는 책임의 일부가 국제관계학의 실패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1년에 쓴 <평화 경제 전망(Perspectives on the Economics of Peace)>에서 국제관계학의 전통적인 처방은 인정하기조차 힘들다고 했다. 전쟁이 주권국가 체제가 가진 고유한 특징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국제기구의 개혁과 연구 및 정보 능력의 개발을 통해 전쟁 예방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데이터 수집과 처리 능력을 통해 갈등 형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을 꾀하고 일반적 외교를 통한 이뤄지는 불충분한 통찰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연구 초기에 연구자들 사이에서 쓰인 ‘갈등’ 용어는 현재의 용어 사용과 달랐다. 갈등은 국가 사이의 전쟁, 또는 무장 갈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또 갈등해결은 국가 사이 무장 충돌과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적 방식을 통해 종식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의 ‘갈등’과 ‘갈등해결’이 국가 사이의 무장 또는 비무장 갈등부터 개인 사이의 갈등까지를 일컫는 보편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평화학이 모든 갈등을 연구 및 실행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1970년대 초부터는 대학교에 평화학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71년에 스웨덴의 웁살라대학교(Uppsala University)에 평화갈등학과가 설립됐고 1973년에는 영국의 브래드포드대학교(University of Bradford)에 평화학과가 설립됐다. 이후 세계 각지에 평화학 프로그램이 설립됐고 현재는 전 세계 400개가 넘는 대학에 다양한 형태의 평화학과와 평화학과 연계된 학위 프로그램이 개설돼 있다.


평화학의 선구자, 그리고 1세대 평화학자라 불리는 연구자들이 평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낳은 폭력과 평화 부재의 상황을 직접, 그것도 불과 2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경험했고 전쟁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 세계에 퍼진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전쟁에 대한 연구의 필요를 자극했다. 연구의 중심 주제는 전쟁을 막을 방법이었다. 당시엔 전쟁이 눈앞의 안전과 생존의 문제였고 그런 접근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다. 다양한 학문적 접근을 참고해 전쟁을 분석해 통계를 내고, 전쟁의 특징과 국제정치적 접근의 문제점을 규명하는 건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현실적 문제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었다.


전쟁에 대한 관심이 조직적 평화연구의 시작이었고 학제로서 평화학의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다른 한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극단적, 대규모적 형태의 폭력이 동반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평화의 필요를 위해 결국 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런 이유로 평화연구의 선구자들은 전쟁 연구자들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전쟁에 대한 개인적 저항감과 평화에 대한 낭만적 추구로 전쟁 예방의 필요성을 주장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의 필요를 주장하기 위해 전쟁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취하고 전쟁의 폭력성과 전쟁 예방의 필요를 논리적으로 피력했다. 퀸시 라이트는 전쟁이 교전을 통해 서로를 파괴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전쟁을 하는 국가들이 완전히 위압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적국의 군대, 통신, 보급망을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전쟁의 목적은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며 이런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적국의 경제적 수단을 파괴하고 압력을 가해 적국 정부와 국민이 어떤 요구에도 굴복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루이스 리차드슨은 1820-1949년 사이에 국가 간 전쟁은 물론 국내에서 생긴 반란, 폭동, 봉기 등이 야기한 인명 피해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는 전쟁과 무력 충돌이 야기하는 인명 손실을 통계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저술은 1950년대 중반 평화연구에 합류한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모든 전쟁 연구의 핵심 주장은 전쟁의 본질은 무력을 통한 파괴고 전쟁에서는 대규모 파괴와 인명 손실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위 내용은 <평화학:  평화적 공존을 위한 이론과 실행>, 철수와영희, 2022,  pp.24-33에서 발췌한 것으로 전체 내용과 미주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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