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상황의 이해
조기 대선과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남북관계의 복원과 ‘한반도 평화’ 담론의 정상화였다. 보수 성향 정권은 9년 동안 남북관계를 완전히 동결시켰고 그에 따라 한반도 평화는 ‘전쟁 없는 평화’로 왜곡됐다. 진보 성향 정권은 남북관계를 회복시키고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라 대화와 평화적 공존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 담론을 정상화하는 과제를 안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것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없고 향후 전망도 밝지는 않다.
현 상황은 과거 보수 성향 정권 하에서의 남북대립과 한반도 긴장의 연장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전보다 더 악화됐다. 과거 정권은 선 핵포기를 주장하고 관계 단절을 한 후 남북관계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무관심 상태를 유지했다. 현 정권은 다르다. 일단 궁극적 목표를 대화와 평화로 설정했다. 그런데 과정은 모순적이다. 과거 보수 성향 정권들보다 더 공격적으로 북한의 포기와 굴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국제사회에 제재와 압박을 요청하고, 한.미 군사훈련과 대북 무력시위를 강화시키며, 국방비 증액을 통해 무력 대립 및 경쟁을 주장하고 있다. 목표는 대화와 평화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더 적극적으로 북한 고립과 대결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북한을 자극하고 감정적 저항을 야기하며 남북관계를 과거보다 악화시키면서 한반도 긴장을 높이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접근을 야기한 원인은 계속되는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이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한 전향적 접근 없는 정책으로 흔히 정권 교체 때 주어지는 ‘명분’과 ‘기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현 정부의 접근은 남북관계를 더 얼어붙게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현 정부의 가장 큰 한계는 평화의 가치가 아니라 힘에 의존하고, 평화로운 과정을 거쳐 지속가능한 평화를 성취한다는 평화의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한계는 곧 시민의 한계를 반영한다. 시민의 의식과 접근도 정부의 수준보다 높지 않고 그것은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율의 유지로 드러나고 있다.
누구의 평화인가?
Whose peace? 평화연구자들이 사례를 성찰하고 분석할 때 던지곤 하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 담론은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독점해 왔다. 대북정책과 한반도 평화 현안 및 담론은 정부 성향에 따라 달라졌다. 일관성 없는 정책이 이어지고 그 결과 남북관계는 지속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으며 남북 사이의 무력 대결 및 긴장은 큰 틀에서 변한 것이 없다. 소위 북한문제 및 국방 전문가들은 정치공학적인 분석과 무력 균형을 강조하는 접근에 매달리면서 북한 관련 정보를 방출하고 사건 사고를 해석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 비주류지만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민.종교단체 또한 민간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한반도 평화 운동과 담론을 독점해 왔다. 대중과의 소통, 정보 공유, 상호 이해가 없는 운동과 담론은 결국 엘리트주의를 만들었고 대중을 소외 내지 배제시켜 왔다. 수십 년 동안 평화통일 운동이 이어져 왔지만 대중에게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중의 인식과 남북 현안에 대한 반응은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민.종교단체의 평화통일 접근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정부, 전문가, 시민.종교단체의 접근은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기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더라도 그들 모두 남북평화 내지 한반도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 붕괴’ 내지는 ‘흡수 통일’의 속내를 가졌을지라도 표면상의 목표는 항상 ‘평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인식, 해석, 이해에 근거한 ‘그들(만)의 평화’다. 다수 대중을 소외시키고, 대중에게 질문하거나 질문할 기회도 제공하지 않으며, 더욱이 대중과 결정권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접근이다. 지금까지 소수가 ‘남북평화’나 ‘한반도 평화’를 독점하고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부과 내지 강요하는 이런 하향식 접근이 계속돼 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큰 틀에서 변하지 않고 있다. 해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임에도 정부는 자기만의 접근을 고수하고 있고 다양한 전문적, 대중적 견해를 수렴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 집단은 여전히 정치공학적, 군사적 접근을 반복하고 있으며 언론은 그것을 대중에게 단순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시민.종교단체는 엘리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오래되고 익숙한 방식과 진행 절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은 여전히 정부, 전문가 집단, 시민.종교단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를 수용 및 소비하면서 독립적이고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고 자신감이 없다.
도전과 시민의 역할
남북관계 악화와 한반도 긴장 심화라는 현재의 상황에 더해 우리는 다른 도전적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현재의 상황이 대변해 주듯이 남북의 무력 대결 및 관계 단절의 고착화다. 그로 인해 모든 시민이 안전의 위협과 ‘평화적 생존권’의 침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에 따른 무기 경쟁의 심화와 국방비 증가는 모두가 치러야 하는 또 다른 비용이다. 2018년도 국방비 총액은 43조 1천억으로 전체 정부 예산의 10.1%를 차지하고 2017년에 비해 6.9% 증가했다. 9년 만에 최고치의 증가율이다. 이중 신형 무기 구매 등을 위한 방위력 개선비는 30.3%다. 국방비는 참여정부 때 11.4%까지 높은 증가율을 보였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는 오히려 2-4% 대의 낮은 증가율을 보였다. 진보 성향의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거기에 대해 대부분의 시민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안보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평화적 공존이 아니라 안보 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 가장 큰 도전은 여전히 대중의 소외 및 배제가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 대북 정책 및 한반도 평화 담론의 독점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도전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 된다. 자신, 가족, 회사, 지역사회, 대한민국, 한반도 등 누구를 위해 어떤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각자의 답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시민 각자가 정부, 전문가 집단, 시민.종교단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책, 정보, 담론 등을 분석하고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 각자가 성찰과 분석을 통해 원하는 평화를 확인하는 것은 상향식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 담론의 형성에 기여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시민사회다. 시민.종교단체가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평화통일 운동을 하고 담론을 형성해 온 시민.종교단체도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대중과 눈높이와 보폭을 맞추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중심이 된 시민사회가 만드는 평화 담론은 경청과 열린 대화에 기초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안보에 종속된 거짓 평화 담론을 바로 잡고, 부과되고 강요된 통일 담론을 해체한 후 새로운 대중의 통일 담론, 또는 평화 및 통일 담론을 만들 수 있다. 무력 대결과 무기 경쟁에 매몰된 남북 평화가 아닌 남북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이 보장되는 평화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남남갈등’도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평화 성취의 원칙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중이 중심이 되는 담론 형성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더 나은 담론을 만들어가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평화와 반전 운동에 평범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향과 방식의 모색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말: 평화를 위한 세계시민의 역할
우리사회는 한반도를 넘어선 평화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담론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동북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 정도다. 이 또한 다른 시각에서 보면 민족주의적 발상이다. 우리사회는 오랜 남북대결로 인해 남북문제에 매몰돼 있다. 이것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무관심의 핑계가 되곤 한다.
모든 인간의 평화롭게 살 권리에 초점을 맞춘 보편적 평화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 담론의 형성은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접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 평화 현안에 대한 성찰과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민들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돼야 비로소 우리의 경제 발전 수준에 맞는 국가와 세계시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 위 글은 2017년 12월 18일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한 6월항쟁30년맞이토론회 <국민주권 선언의 의의와 한국사회의 과제>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출처를 명시해야 합니다.
현 상황의 이해
조기 대선과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남북관계의 복원과 ‘한반도 평화’ 담론의 정상화였다. 보수 성향 정권은 9년 동안 남북관계를 완전히 동결시켰고 그에 따라 한반도 평화는 ‘전쟁 없는 평화’로 왜곡됐다. 진보 성향 정권은 남북관계를 회복시키고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라 대화와 평화적 공존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 담론을 정상화하는 과제를 안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것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없고 향후 전망도 밝지는 않다.
현 상황은 과거 보수 성향 정권 하에서의 남북대립과 한반도 긴장의 연장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전보다 더 악화됐다. 과거 정권은 선 핵포기를 주장하고 관계 단절을 한 후 남북관계나 한반도 평화에 대한 무관심 상태를 유지했다. 현 정권은 다르다. 일단 궁극적 목표를 대화와 평화로 설정했다. 그런데 과정은 모순적이다. 과거 보수 성향 정권들보다 더 공격적으로 북한의 포기와 굴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국제사회에 제재와 압박을 요청하고, 한.미 군사훈련과 대북 무력시위를 강화시키며, 국방비 증액을 통해 무력 대립 및 경쟁을 주장하고 있다. 목표는 대화와 평화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더 적극적으로 북한 고립과 대결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북한을 자극하고 감정적 저항을 야기하며 남북관계를 과거보다 악화시키면서 한반도 긴장을 높이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접근을 야기한 원인은 계속되는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이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한 전향적 접근 없는 정책으로 흔히 정권 교체 때 주어지는 ‘명분’과 ‘기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현 정부의 접근은 남북관계를 더 얼어붙게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현 정부의 가장 큰 한계는 평화의 가치가 아니라 힘에 의존하고, 평화로운 과정을 거쳐 지속가능한 평화를 성취한다는 평화의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한계는 곧 시민의 한계를 반영한다. 시민의 의식과 접근도 정부의 수준보다 높지 않고 그것은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율의 유지로 드러나고 있다.
누구의 평화인가?
Whose peace? 평화연구자들이 사례를 성찰하고 분석할 때 던지곤 하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 담론은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독점해 왔다. 대북정책과 한반도 평화 현안 및 담론은 정부 성향에 따라 달라졌다. 일관성 없는 정책이 이어지고 그 결과 남북관계는 지속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으며 남북 사이의 무력 대결 및 긴장은 큰 틀에서 변한 것이 없다. 소위 북한문제 및 국방 전문가들은 정치공학적인 분석과 무력 균형을 강조하는 접근에 매달리면서 북한 관련 정보를 방출하고 사건 사고를 해석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 비주류지만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민.종교단체 또한 민간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한반도 평화 운동과 담론을 독점해 왔다. 대중과의 소통, 정보 공유, 상호 이해가 없는 운동과 담론은 결국 엘리트주의를 만들었고 대중을 소외 내지 배제시켜 왔다. 수십 년 동안 평화통일 운동이 이어져 왔지만 대중에게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중의 인식과 남북 현안에 대한 반응은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민.종교단체의 평화통일 접근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정부, 전문가, 시민.종교단체의 접근은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기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더라도 그들 모두 남북평화 내지 한반도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 붕괴’ 내지는 ‘흡수 통일’의 속내를 가졌을지라도 표면상의 목표는 항상 ‘평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인식, 해석, 이해에 근거한 ‘그들(만)의 평화’다. 다수 대중을 소외시키고, 대중에게 질문하거나 질문할 기회도 제공하지 않으며, 더욱이 대중과 결정권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접근이다. 지금까지 소수가 ‘남북평화’나 ‘한반도 평화’를 독점하고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부과 내지 강요하는 이런 하향식 접근이 계속돼 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큰 틀에서 변하지 않고 있다. 해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임에도 정부는 자기만의 접근을 고수하고 있고 다양한 전문적, 대중적 견해를 수렴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 집단은 여전히 정치공학적, 군사적 접근을 반복하고 있으며 언론은 그것을 대중에게 단순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시민.종교단체는 엘리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오래되고 익숙한 방식과 진행 절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은 여전히 정부, 전문가 집단, 시민.종교단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를 수용 및 소비하면서 독립적이고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고 자신감이 없다.
도전과 시민의 역할
남북관계 악화와 한반도 긴장 심화라는 현재의 상황에 더해 우리는 다른 도전적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현재의 상황이 대변해 주듯이 남북의 무력 대결 및 관계 단절의 고착화다. 그로 인해 모든 시민이 안전의 위협과 ‘평화적 생존권’의 침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에 따른 무기 경쟁의 심화와 국방비 증가는 모두가 치러야 하는 또 다른 비용이다. 2018년도 국방비 총액은 43조 1천억으로 전체 정부 예산의 10.1%를 차지하고 2017년에 비해 6.9% 증가했다. 9년 만에 최고치의 증가율이다. 이중 신형 무기 구매 등을 위한 방위력 개선비는 30.3%다. 국방비는 참여정부 때 11.4%까지 높은 증가율을 보였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는 오히려 2-4% 대의 낮은 증가율을 보였다. 진보 성향의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거기에 대해 대부분의 시민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안보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평화적 공존이 아니라 안보 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 가장 큰 도전은 여전히 대중의 소외 및 배제가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 대북 정책 및 한반도 평화 담론의 독점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도전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 된다. 자신, 가족, 회사, 지역사회, 대한민국, 한반도 등 누구를 위해 어떤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각자의 답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시민 각자가 정부, 전문가 집단, 시민.종교단체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책, 정보, 담론 등을 분석하고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 각자가 성찰과 분석을 통해 원하는 평화를 확인하는 것은 상향식 남북관계 및 한반도 평화 담론의 형성에 기여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시민사회다. 시민.종교단체가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평화통일 운동을 하고 담론을 형성해 온 시민.종교단체도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대중과 눈높이와 보폭을 맞추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중심이 된 시민사회가 만드는 평화 담론은 경청과 열린 대화에 기초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안보에 종속된 거짓 평화 담론을 바로 잡고, 부과되고 강요된 통일 담론을 해체한 후 새로운 대중의 통일 담론, 또는 평화 및 통일 담론을 만들 수 있다. 무력 대결과 무기 경쟁에 매몰된 남북 평화가 아닌 남북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이 보장되는 평화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남남갈등’도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평화 성취의 원칙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중이 중심이 되는 담론 형성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더 나은 담론을 만들어가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평화와 반전 운동에 평범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향과 방식의 모색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말: 평화를 위한 세계시민의 역할
우리사회는 한반도를 넘어선 평화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담론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동북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 정도다. 이 또한 다른 시각에서 보면 민족주의적 발상이다. 우리사회는 오랜 남북대결로 인해 남북문제에 매몰돼 있다. 이것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무관심의 핑계가 되곤 한다.
모든 인간의 평화롭게 살 권리에 초점을 맞춘 보편적 평화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 담론의 형성은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접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 평화 현안에 대한 성찰과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민들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돼야 비로소 우리의 경제 발전 수준에 맞는 국가와 세계시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 위 글은 2017년 12월 18일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한 6월항쟁30년맞이토론회 <국민주권 선언의 의의와 한국사회의 과제>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출처를 명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