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와 희생의 강요
사드 배치 논란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조명한다.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고 사드 배치를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사드 배치 철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 사드 배치 논란의 근본원인으로 볼 수 있는 이 문제들은 사드 배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너무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그래서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도전이 되는 문제들 중 첫 번째는, 남과 북이 적대관계에 있는 상황 하에서 개인과 집단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삶이 하루아침에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고 한반도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개인의 삶보다 국가 안보가 우선시되고, 안보 담론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결정으로 성주와 김천 지역사회와 종교공동체, 그리고 거기 속해 있는 개인의 삶이 무너지고 있지만 정부는 북한과의 대립과 불안한 한반도 정세를 언급하며 불가피한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주장이 될 수 있는가?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권리와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두 번째는, 국가 안보를 위한 개인과 집단의 희생이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도 정당화되고 강요된다는 것이다. 국가 안보 담론이 사회와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 담론에 매몰된 대중은 사드 배치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지역사회와 주민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5월 1-2일, 5월 12-13일, 그리고 8월 11-12일 실시한 세 차례의 여론조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세 차례의 조사를 보면 사드 재검토 여론은 28.9%(5.1~2)→56.1%(5.12~13)→33.0%(8.11~12)로 두 배가량 올랐다 내려갔다. 반면, 사드 배치 '수용·찬성' 여론은 65.2%(5.1~2)→39.9%(5.12~13)→60.8%(8.11~12)로 대선 직후 큰 폭으로 하락했다 세 달 만에 20% 이상 올랐다.
여론이 이렇게 큰 변화를 보인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북한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대응이다.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와, 결정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이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정권에 대한 높은 지지가 사드 수용 및 찬성으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정부가 그동안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사실상 ‘철회 불가’ 태도를 보이며 추가 발사대 배치까지 결정하자 정권을 지지하는 대중도 사드 배치에 지지를 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정부도 대중도 효용성이 아니라 불안한 안보 상황의 관리, 한.미 공조 강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사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지 주민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안보 담론을 내세우며 희생을 강요하고 나아가 정당화하고 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어지는 안보가 국가 안보로서 진정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소수라는 이유로 개인과 집단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 안보가 의미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는, 우리사회가 ‘공익’, 다시 말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내세워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물론 대중도 사드 배치가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고, 국가 안보는 곧 공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공익을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될 수도, 나아가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구시대적, 반인권적, 반민주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정부가 해왔던 각종 국책사업의 근저에 깔려있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공공갈등이 증가하고 장기화되는 경험을 해왔다. 그런데 이 담론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공익이면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하는데 특정 지역이나 주민, 다시 말해 국책사업으로 인해 건강이나 재산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문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공갈등은 항상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공익을 위해 정말 필요하다면 해당 지역사회와 대화 및 합의를 거쳐 진행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수용을 강요하며, 나아가 공익을 내세워 여론을 설득하고 해당 지역사회를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네 번째는, 평화 성취를 위한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의 두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겠다며 관계를 단절하고 인도적 지원을 중단시켰으며, 국제사회와 연대해 압박과 제재를 계속했다. 현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과 대화를 하고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현재는 대화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압박과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화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이웃과 화해하기 위해 물리적 힘과 주변 사람들까지 동원해 최대한 압박을 가하고 경제적 피해를 주는 일까지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제관계에서는 상황이 변화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대립은 잊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접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 번 양보해 국제 문제의 특수성을 고려한다 해도 그런 압박 수단이 무기 체계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무기 체계는 가장 강력한 위협 수단이고 한 번 배치되면 반영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분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힘 대 힘 대결 방식을 통해 적대적 공존과 상호 불가침 상황을 달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유감스럽지만 적어도 모순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최종 목표가 ‘평화’라면 무기를 이용한 방식은 답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무기 체계가 효용성이 아니라 미국과의 공조와 중국에 대한 압박을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자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더욱 더 모순적이다. 무력시위, 그것도 다른 나라의 무력시위를 위해 자국민에게 ‘평화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들은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민주주의 사회로서 모순적인지를 보여준다. 때문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드 배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평화의 시각에서 사드 배치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담론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1. 무기, ‘평화’를 보장하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국가들이 무기 개발과 수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기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곧 ‘전쟁 부재’를 의미하고, 전쟁 부재는 무력 균형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냉전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무기가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은 전쟁 억지력이다. 보복이 두려워 서로 공격하지 않는, 곧 전쟁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진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위의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전쟁 억지력만 강조해 무기에 집착하면서 진정한 평화와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기를 통해 무력 균형을 이루면 전쟁이 억지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론상 전쟁 가능성은 높아진다.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많고 상대와 적대적 관계가 강화 내지 고착되기 때문이다. 적대적 관계에서는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항상 국지적 무력 충돌 가능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가 그렇다. 이런 상황을 ‘평화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전쟁의 부재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부재는 평화가 아니라 물리적 폭력 중 한 가지가 부재하는 상황, 다시 말해 물리적 폭력이 없는 소극적(negative) 평화가 일부분 달성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전쟁의 부재나 소극적 평화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억압이나 강요를 받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을 때 이뤄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의 이런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국가 권력, 다시 말해 정부에 의해 가하지는 억압과 강요인데 사드 배치는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정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국가 안보를 위해, 그리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드 배치 결정 때문에 성주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흔들렸고, 배치지 변경으로 김천 사람들의 삶까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배치지에 있는 종교공동체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이것은 지극히 모순적인 상황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사드 때문에 더 안전해진다고 하는데 성주와 김천 주민들, 그리고 종교공동체는 삶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들에게 사드는 절대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부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도 사드는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사이 적대관계를 강화시키고, 그 결과 불안과 무력 충돌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특별히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사드는 절대 평화와 연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깨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무기 체계를 갖추면 전쟁 억지력 확보와 국민의 평화로운 삶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두 가지에 모순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모순이 생기지 않게 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2.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나?
사드 배치가 처음 논란이 됐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과연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막는 데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정부가 필요하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기로서 효용성이 없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됐다. 그럼에도 정부는 한.미 군사적 공조, 북한과 중국에 대한 압박 등 군사 전략상 필요하다는 주장 하에 발사대 추가 배치까지 결정했다. 정부는 이것이 결국 북한을 대화 자리로 끌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고, 미국에게만 도움이 되는 사드 배치는 남한의 지나친 친미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남북관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무기 자체의 효용성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9년 동안 완전히 망가진 남북관계를 회복하고 대화의 물고를 터야 장기적 시각에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할 수 있는데 사드는 오히려 방해만 되고 있다.
사드는 무기체계로서 효용성은 없는데 다른 면에서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미움과 대립을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는 남과 북의 대립 및 적대 관계를 강화시켰고, 비교적 양호했던 중국 정부 및 국민들과 우리의 관계까지 대립과 증오의 관계로 만들었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원하는 무기 체계를 위해 우리가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을 만든 근본 이유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90년대부터 지속됐던 것이고 지난 정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의 핵무기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든 것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면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군사적 방법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대립과 증오는 심해지고 관계는 더 악화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사회 내부의 대립과 다툼이다. 이전 정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 정부가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함께 촛불을 들고 새 정권을 위해 힘을 모았던 사람들 사이에도 대립이 형성됐고 다툼이 일고 있다. 우리사회는 물론 한반도 안과 밖에도 미움, 증오, 대립 등 비평화적 기운이 넘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오히려 무력 대응 정서가 확대되고 군사문화가 강해지면서 평화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3. 사드 논란, 공공갈등이 아닌가?
사드 배치로 야기된 정부와 지역사회, 종교공동체, 시민사회와의 대립은 공공갈등으로 볼 수 있다. 공공갈등은 정부의 정책이나 사업을 둘러싸고 주로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에 생기는 대립과 다툼을 말한다. 사드 배치 논란의 발생과 전개 과정은 일반적 공공갈등의 경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공공갈등의 발생과 전개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 소통의 부재, 그리고 힘에 의존하는 밀어붙이기다. 우리사회를 뒤흔들었고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대규모 공공갈등이 모두 이런 과정을 밟았다. 이전 정부, 특별히 청와대는 사드 배치를 일방적으로, 심지어 국방부와 외교부도 따돌린 채 결정했다. 성주군은 강력히 반대하며 저항했고, 정부와의 갈등은 곧장 위기 국면으로 치달았다. 배치지가 변경되고 김천시까지 저항하는 상황 속에서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이전 정부와는 다른 전개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현 정부가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및 김천 주민들, 종교공동체,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혀 새롭지 않다. ‘갈등관리’ 접근을 채택해 신고리 5,6호기 건설과 원전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중인 사회갈등을 중단 및 예방하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접근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부는 애써 사드 배치 논란을 공공갈등으로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사드 배치를 국가 안보와 직접 관련된 문제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 공공갈등에 대한 접근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사드 배치지는 소각장, 원전, 화력발전소, 군비행장과 같이 ‘기피시설’일 뿐이다.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파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미군이 주둔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선 예상하기 어렵다. 한국군 부대도 기피하는 마당에 미군 부대는 더 기피할 수밖에 없다. 운영 권한이 전적으로 미군에게 있고 정보 접근이 한정되기 때문에 사드가 어떻게 운용될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지역 주민드르이 재산권을 침해하고, 나아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삶의 의미를 훼손하며, 현재와 미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다. 다른 공공갈등에서도 보통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공공갈등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접근은 공공기관이 시민 당사자들의 이견을 청취해서 실행 또는 철회를 결정하거나 수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사드 문제는 그렇게 대응할 공공갈등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반대 주민 및 단체들을 배제시킨 일방적 결정과 소통 부재를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저항을 고려해 속도와 강도를 조금 조정하고 있는 상황을 최선의 소통 내지 배려라고 보는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부가 아무리 사드 문제를 공공갈등이 아닌 국가 안보 문제로 보려고 해도 갈등은 이미 생겼고 진행 중이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겪었던 다른 공공갈등의 경로를 그대로 밟고 있다. 그래서 더 결말이 두려워지는 상황이다.
사드 배치 문제를 공공갈등으로 보면 현재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불합리한지 알 수 있다. 공공갈등에 대한 정부 내지 공공기관의 가장 바람직한 접근은, 일단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시민 당사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사업의 실행을 중단시킨 후 공동의 논의와 합의를 만드는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다. 필요할 경우 지역사회 내지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는 논의 과정도 지원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부와 시민당사자 모두 계속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며, 서로를 설득하고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런 과정은 일시적, 간헐적, 비공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런 접근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민주주의 하에서 공공 정책이나 사업은 결국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특별히 당사자에게 수용 또는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설사 공익을 위해서라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드 배치와 관련해 정부는 이런 접근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사드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공공갈등해결 시각으로 보면 낙제점이라 할 수밖에 없다.
4. 사드 배치, 민생 문제다.
정부는 사드 배치를 국가 안보 내지 군사 문제라고 생각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일종의 성역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드 배치는 민생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저항도 심한 것이다. 건강권과 재산권 등 자신의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며, 그 결과 삶의 질 하락은 물론 생존까지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입 다물고 있을 사람은 없다. 때로 공공기관은 물론 대중도 이런 당사자들의 저항을 지역이기주의나 ‘님비(NIMBY)' 등으로 취급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권리 주장이다. 특별히 사드는 성주와 김천 같은 배치지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민생 현안이다. 중국의 무역보복으로 관광업, 의류업, 화장품업, 식품업 등이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중국 내 한국 기업 및 자영업자들의 피해도 늘고 있다. 당연히 관련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나 유통업 관계자들도 피해를 입고 있다. 사드가 민생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드로 인해 누군가의 삶에 타격이 가해지고 나아가 생존까지 위협한다면 효용성이 아니라 전략적 가치 때문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수가 없다. 사드는 금강산 관광 중단이나 개성공단 폐쇄로 중소기업, 노동자, 자영업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부도 대중도 이런 문제를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사드 배치로 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은 ‘국가 안보’를 내세운 정부의 인식과 접근이 가진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안보는 추상적인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리고 거부한다면 그런 ‘국가 안보’는 재고돼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국가 안보라는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안보’ 개념에 비춰봤을 때도 타당하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군사력에 의존하고 영토 및 주권에 초점을 맞춘 안보가 아니라 국가사회 내 개인 및 집단의 생명, 안전, 행복, 인간다운 삶에 초점을 맞춘 '인간안보(human security)'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사드 배치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개념을 거스른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성주와 김천 주민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종교공동체는 사드 배치를 거부할 권리와 자유가 있고 그 선택은 존중돼야 한다. 그럼에도 안보 논리에 따라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난다. 안보를 위해 민생을 희생시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설사 전체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라 해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두의 평화, 종교의 비전
지금까지 평화의 시각에서 사드 배치 문제를 살펴봤다. 그런데 궁극적 목적은 평화의 가치를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시각으로 문제를 재분석하고, 사드 배치를 단선적이고 좁은 방식이 아닌 다양한 접근을 통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의 시각으로 사드 논란을 분석한 것에 크게 반대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다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거나 ‘어디엔가는 배치를 해야 한다’거나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스스로 인정한 합리성과 정당성을 거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사드 배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정부와 대중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고, 그러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희생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드 배치 논란을 계기로 우리사회, 나아가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위해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모색해봐야 한다. 특별히 사드에 반대하는 종교공동체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평화연구자의 시각으로 여러 가지를 언급했지만 사실 모든 종교는 윤리적으로 그런 주장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니 종교공동체는 이번 기회에 서두에서 언급한 사드 배치 논란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깊고 넓게 탐구하고, 그에 대응하는 종교적 담론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종교는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는 무력과 무기에 의존하는 왜곡된 평화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 성취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남북의 군사적 대결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이 땅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래야 성주와 김천 사람들은 물론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고, 나아가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도 성취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지역사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야 한다면 기꺼이 그 임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동시에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식을 통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결과 다툼이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적극 모색하며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성주와 김천은 물론 우리사회와 한반도 전체의 평화 성취를 위해 종교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 위 글은 2017년 8월 30일 원불교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의 <진밭평화강좌>에서 한 강연의 원고입니다. 무단 배포 및 인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안보와 희생의 강요
사드 배치 논란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조명한다.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고 사드 배치를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사드 배치 철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 사드 배치 논란의 근본원인으로 볼 수 있는 이 문제들은 사드 배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너무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그래서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도전이 되는 문제들 중 첫 번째는, 남과 북이 적대관계에 있는 상황 하에서 개인과 집단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삶이 하루아침에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고 한반도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개인의 삶보다 국가 안보가 우선시되고, 안보 담론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결정으로 성주와 김천 지역사회와 종교공동체, 그리고 거기 속해 있는 개인의 삶이 무너지고 있지만 정부는 북한과의 대립과 불안한 한반도 정세를 언급하며 불가피한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주장이 될 수 있는가?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권리와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두 번째는, 국가 안보를 위한 개인과 집단의 희생이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도 정당화되고 강요된다는 것이다. 국가 안보 담론이 사회와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 담론에 매몰된 대중은 사드 배치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지역사회와 주민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5월 1-2일, 5월 12-13일, 그리고 8월 11-12일 실시한 세 차례의 여론조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세 차례의 조사를 보면 사드 재검토 여론은 28.9%(5.1~2)→56.1%(5.12~13)→33.0%(8.11~12)로 두 배가량 올랐다 내려갔다. 반면, 사드 배치 '수용·찬성' 여론은 65.2%(5.1~2)→39.9%(5.12~13)→60.8%(8.11~12)로 대선 직후 큰 폭으로 하락했다 세 달 만에 20% 이상 올랐다.
여론이 이렇게 큰 변화를 보인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북한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대응이다.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와, 결정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이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정권에 대한 높은 지지가 사드 수용 및 찬성으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정부가 그동안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사실상 ‘철회 불가’ 태도를 보이며 추가 발사대 배치까지 결정하자 정권을 지지하는 대중도 사드 배치에 지지를 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정부도 대중도 효용성이 아니라 불안한 안보 상황의 관리, 한.미 공조 강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사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지 주민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안보 담론을 내세우며 희생을 강요하고 나아가 정당화하고 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어지는 안보가 국가 안보로서 진정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소수라는 이유로 개인과 집단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 안보가 의미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는, 우리사회가 ‘공익’, 다시 말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내세워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물론 대중도 사드 배치가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고, 국가 안보는 곧 공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공익을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될 수도, 나아가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구시대적, 반인권적, 반민주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정부가 해왔던 각종 국책사업의 근저에 깔려있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공공갈등이 증가하고 장기화되는 경험을 해왔다. 그런데 이 담론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공익이면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하는데 특정 지역이나 주민, 다시 말해 국책사업으로 인해 건강이나 재산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문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공갈등은 항상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공익을 위해 정말 필요하다면 해당 지역사회와 대화 및 합의를 거쳐 진행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수용을 강요하며, 나아가 공익을 내세워 여론을 설득하고 해당 지역사회를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네 번째는, 평화 성취를 위한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의 두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겠다며 관계를 단절하고 인도적 지원을 중단시켰으며, 국제사회와 연대해 압박과 제재를 계속했다. 현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과 대화를 하고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현재는 대화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압박과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화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이웃과 화해하기 위해 물리적 힘과 주변 사람들까지 동원해 최대한 압박을 가하고 경제적 피해를 주는 일까지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제관계에서는 상황이 변화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대립은 잊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접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 번 양보해 국제 문제의 특수성을 고려한다 해도 그런 압박 수단이 무기 체계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무기 체계는 가장 강력한 위협 수단이고 한 번 배치되면 반영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분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힘 대 힘 대결 방식을 통해 적대적 공존과 상호 불가침 상황을 달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유감스럽지만 적어도 모순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최종 목표가 ‘평화’라면 무기를 이용한 방식은 답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무기 체계가 효용성이 아니라 미국과의 공조와 중국에 대한 압박을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자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더욱 더 모순적이다. 무력시위, 그것도 다른 나라의 무력시위를 위해 자국민에게 ‘평화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들은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민주주의 사회로서 모순적인지를 보여준다. 때문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드 배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평화의 시각에서 사드 배치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담론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1. 무기, ‘평화’를 보장하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국가들이 무기 개발과 수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기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곧 ‘전쟁 부재’를 의미하고, 전쟁 부재는 무력 균형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냉전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무기가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은 전쟁 억지력이다. 보복이 두려워 서로 공격하지 않는, 곧 전쟁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진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위의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전쟁 억지력만 강조해 무기에 집착하면서 진정한 평화와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기를 통해 무력 균형을 이루면 전쟁이 억지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론상 전쟁 가능성은 높아진다.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많고 상대와 적대적 관계가 강화 내지 고착되기 때문이다. 적대적 관계에서는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항상 국지적 무력 충돌 가능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북 관계가 그렇다. 이런 상황을 ‘평화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전쟁의 부재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부재는 평화가 아니라 물리적 폭력 중 한 가지가 부재하는 상황, 다시 말해 물리적 폭력이 없는 소극적(negative) 평화가 일부분 달성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전쟁의 부재나 소극적 평화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억압이나 강요를 받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을 때 이뤄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의 이런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국가 권력, 다시 말해 정부에 의해 가하지는 억압과 강요인데 사드 배치는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정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국가 안보를 위해, 그리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드 배치 결정 때문에 성주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흔들렸고, 배치지 변경으로 김천 사람들의 삶까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배치지에 있는 종교공동체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이것은 지극히 모순적인 상황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사드 때문에 더 안전해진다고 하는데 성주와 김천 주민들, 그리고 종교공동체는 삶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들에게 사드는 절대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부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도 사드는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사이 적대관계를 강화시키고, 그 결과 불안과 무력 충돌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특별히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사드는 절대 평화와 연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깨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무기 체계를 갖추면 전쟁 억지력 확보와 국민의 평화로운 삶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두 가지에 모순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모순이 생기지 않게 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2.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나?
사드 배치가 처음 논란이 됐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과연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막는 데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정부가 필요하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기로서 효용성이 없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됐다. 그럼에도 정부는 한.미 군사적 공조, 북한과 중국에 대한 압박 등 군사 전략상 필요하다는 주장 하에 발사대 추가 배치까지 결정했다. 정부는 이것이 결국 북한을 대화 자리로 끌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고, 미국에게만 도움이 되는 사드 배치는 남한의 지나친 친미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남북관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무기 자체의 효용성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9년 동안 완전히 망가진 남북관계를 회복하고 대화의 물고를 터야 장기적 시각에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할 수 있는데 사드는 오히려 방해만 되고 있다.
사드는 무기체계로서 효용성은 없는데 다른 면에서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미움과 대립을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는 남과 북의 대립 및 적대 관계를 강화시켰고, 비교적 양호했던 중국 정부 및 국민들과 우리의 관계까지 대립과 증오의 관계로 만들었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원하는 무기 체계를 위해 우리가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을 만든 근본 이유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90년대부터 지속됐던 것이고 지난 정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의 핵무기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든 것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면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군사적 방법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대립과 증오는 심해지고 관계는 더 악화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사회 내부의 대립과 다툼이다. 이전 정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 정부가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함께 촛불을 들고 새 정권을 위해 힘을 모았던 사람들 사이에도 대립이 형성됐고 다툼이 일고 있다. 우리사회는 물론 한반도 안과 밖에도 미움, 증오, 대립 등 비평화적 기운이 넘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오히려 무력 대응 정서가 확대되고 군사문화가 강해지면서 평화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3. 사드 논란, 공공갈등이 아닌가?
사드 배치로 야기된 정부와 지역사회, 종교공동체, 시민사회와의 대립은 공공갈등으로 볼 수 있다. 공공갈등은 정부의 정책이나 사업을 둘러싸고 주로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에 생기는 대립과 다툼을 말한다. 사드 배치 논란의 발생과 전개 과정은 일반적 공공갈등의 경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공공갈등의 발생과 전개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 소통의 부재, 그리고 힘에 의존하는 밀어붙이기다. 우리사회를 뒤흔들었고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대규모 공공갈등이 모두 이런 과정을 밟았다. 이전 정부, 특별히 청와대는 사드 배치를 일방적으로, 심지어 국방부와 외교부도 따돌린 채 결정했다. 성주군은 강력히 반대하며 저항했고, 정부와의 갈등은 곧장 위기 국면으로 치달았다. 배치지가 변경되고 김천시까지 저항하는 상황 속에서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이전 정부와는 다른 전개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현 정부가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및 김천 주민들, 종교공동체,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혀 새롭지 않다. ‘갈등관리’ 접근을 채택해 신고리 5,6호기 건설과 원전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중인 사회갈등을 중단 및 예방하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접근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부는 애써 사드 배치 논란을 공공갈등으로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사드 배치를 국가 안보와 직접 관련된 문제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 공공갈등에 대한 접근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사드 배치지는 소각장, 원전, 화력발전소, 군비행장과 같이 ‘기피시설’일 뿐이다.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파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미군이 주둔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선 예상하기 어렵다. 한국군 부대도 기피하는 마당에 미군 부대는 더 기피할 수밖에 없다. 운영 권한이 전적으로 미군에게 있고 정보 접근이 한정되기 때문에 사드가 어떻게 운용될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지역 주민드르이 재산권을 침해하고, 나아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삶의 의미를 훼손하며, 현재와 미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다. 다른 공공갈등에서도 보통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공공갈등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접근은 공공기관이 시민 당사자들의 이견을 청취해서 실행 또는 철회를 결정하거나 수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사드 문제는 그렇게 대응할 공공갈등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반대 주민 및 단체들을 배제시킨 일방적 결정과 소통 부재를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저항을 고려해 속도와 강도를 조금 조정하고 있는 상황을 최선의 소통 내지 배려라고 보는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부가 아무리 사드 문제를 공공갈등이 아닌 국가 안보 문제로 보려고 해도 갈등은 이미 생겼고 진행 중이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겪었던 다른 공공갈등의 경로를 그대로 밟고 있다. 그래서 더 결말이 두려워지는 상황이다.
사드 배치 문제를 공공갈등으로 보면 현재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불합리한지 알 수 있다. 공공갈등에 대한 정부 내지 공공기관의 가장 바람직한 접근은, 일단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시민 당사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사업의 실행을 중단시킨 후 공동의 논의와 합의를 만드는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다. 필요할 경우 지역사회 내지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는 논의 과정도 지원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부와 시민당사자 모두 계속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며, 서로를 설득하고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런 과정은 일시적, 간헐적, 비공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런 접근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민주주의 하에서 공공 정책이나 사업은 결국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특별히 당사자에게 수용 또는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설사 공익을 위해서라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드 배치와 관련해 정부는 이런 접근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사드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공공갈등해결 시각으로 보면 낙제점이라 할 수밖에 없다.
4. 사드 배치, 민생 문제다.
정부는 사드 배치를 국가 안보 내지 군사 문제라고 생각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일종의 성역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드 배치는 민생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저항도 심한 것이다. 건강권과 재산권 등 자신의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며, 그 결과 삶의 질 하락은 물론 생존까지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입 다물고 있을 사람은 없다. 때로 공공기관은 물론 대중도 이런 당사자들의 저항을 지역이기주의나 ‘님비(NIMBY)' 등으로 취급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권리 주장이다. 특별히 사드는 성주와 김천 같은 배치지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민생 현안이다. 중국의 무역보복으로 관광업, 의류업, 화장품업, 식품업 등이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중국 내 한국 기업 및 자영업자들의 피해도 늘고 있다. 당연히 관련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나 유통업 관계자들도 피해를 입고 있다. 사드가 민생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드로 인해 누군가의 삶에 타격이 가해지고 나아가 생존까지 위협한다면 효용성이 아니라 전략적 가치 때문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수가 없다. 사드는 금강산 관광 중단이나 개성공단 폐쇄로 중소기업, 노동자, 자영업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부도 대중도 이런 문제를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사드 배치로 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은 ‘국가 안보’를 내세운 정부의 인식과 접근이 가진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안보는 추상적인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리고 거부한다면 그런 ‘국가 안보’는 재고돼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국가 안보라는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안보’ 개념에 비춰봤을 때도 타당하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군사력에 의존하고 영토 및 주권에 초점을 맞춘 안보가 아니라 국가사회 내 개인 및 집단의 생명, 안전, 행복, 인간다운 삶에 초점을 맞춘 '인간안보(human security)'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사드 배치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개념을 거스른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성주와 김천 주민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종교공동체는 사드 배치를 거부할 권리와 자유가 있고 그 선택은 존중돼야 한다. 그럼에도 안보 논리에 따라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난다. 안보를 위해 민생을 희생시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설사 전체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라 해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두의 평화, 종교의 비전
지금까지 평화의 시각에서 사드 배치 문제를 살펴봤다. 그런데 궁극적 목적은 평화의 가치를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시각으로 문제를 재분석하고, 사드 배치를 단선적이고 좁은 방식이 아닌 다양한 접근을 통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의 시각으로 사드 논란을 분석한 것에 크게 반대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다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거나 ‘어디엔가는 배치를 해야 한다’거나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스스로 인정한 합리성과 정당성을 거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사드 배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정부와 대중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고, 그러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희생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드 배치 논란을 계기로 우리사회, 나아가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위해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모색해봐야 한다. 특별히 사드에 반대하는 종교공동체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평화연구자의 시각으로 여러 가지를 언급했지만 사실 모든 종교는 윤리적으로 그런 주장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니 종교공동체는 이번 기회에 서두에서 언급한 사드 배치 논란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깊고 넓게 탐구하고, 그에 대응하는 종교적 담론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종교는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는 무력과 무기에 의존하는 왜곡된 평화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 성취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남북의 군사적 대결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이 땅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래야 성주와 김천 사람들은 물론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고, 나아가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도 성취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지역사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야 한다면 기꺼이 그 임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동시에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식을 통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결과 다툼이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적극 모색하며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성주와 김천은 물론 우리사회와 한반도 전체의 평화 성취를 위해 종교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 위 글은 2017년 8월 30일 원불교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의 <진밭평화강좌>에서 한 강연의 원고입니다. 무단 배포 및 인용을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