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공동체성
평화를 논할 때 주목해야 할 두 단어는 관계와 공동체다. 평화는 관계 속에서 정의되기 때문이고 평화가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공동체기 때문이다. 관계를 성찰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평화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없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평화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없다. 관계는 평화의 기본적인 조건이고 공동체는 관계의 결과이자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먼저 관계를 살펴보자. 관계는 평화의 존재 여부와 질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요소다. 평화는 이론적으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에서 성취된다. 이것은 곧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물리적 힘을 이용해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적극적 평화의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물리적 폭력의 부재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화적 폭력까지 없어야 최종적으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평화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관계 속에서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구조와 문화를 이용한 어떤 폭력도 가하지 않을 때, 다른 말로 누구도 구조적, 문화적 폭력에 희생되지 않을 때 평화가 성취될 수 있다. 평화가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계의 주체는 다양하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집단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도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관계는 서로 다른 주체들 사이에 만들어지고 각 주체는 자기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들의 서로 다른 점을 우리는 보통 ‘차이’라고 부른다.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때로 그것은 힘의 관계를 만드는 ‘핑계’ 또는 ‘합리적 이유’가 된다. 보통 한 주체가 다른 주체와의 관계에서 자기 이익을 취하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이런 힘의 관계를 만들고 강화시킨다. 관계에 힘이 개입하고 힘에 의해 관계의 성격이 규정되면 그 관계는 폭력적이 된다. 이런 힘의 관계, 다른 말로 폭력적 관계에서는 어떤 평화도 가능하지 않고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 상대적 약자의 저항으로 인해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힘이 개입되지 않는 관계에서는 평화가 성취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관계는 공동체의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제 공동체를 살펴보자.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작은 규모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연대를 통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여러 형태의 공동사회를 말한다. 지리적, 또는 비지리적 공동체 모두를 포함하며 작은 집단부터 국가사회와 심지어 국제 공동체(international community)까지를 아우른다. 규모가 어찌됐든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관계에 기초해서 형성되고 유지된다. 다양한 구성원들과 그들 사이 관계들이 존재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재가 가능해진다. 평화가 목표로 삼는 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평화적 관계에 기초해 만들어지는 평화적 공동체다. 동시에 구성원들 사이 평화적 관계의 유지에 기여하는 공동체다.
평화적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가 성취된 공동체를 말한다. 외부 상황이 어떻든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만은 소극적, 적극적 평화가 성취된 공동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내에 물리적 폭력은 물론 구조적, 문화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쉽지도 않다. 공동체의 규모가 크고, 구성원들이 다양하고, 그들의 관계가 복잡할수록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평화의 성취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현 상황(status quo)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안에서 이익을 얻는 다양한 주체들에 도전하며, 무엇보다 폭력에 희생되는 주체들의 각성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수 년, 또는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평화는 '성취‘라는 최종 목표보다 성취를 향해하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춘다. 과정 속에서 평화의 조건을 충족시켜가기 위해 점진적으로 관계를 변화시키고, 사회 구조 및 환경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상호작용, 연대, 타협, 합의 등에 초점을 맞춘다. 과정 자체가 평화로워야 평화의 성취 가능성이 높아지고 각 결과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으로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를 완전히 성취한 공동체라기보다 평화 성취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평화적 과정을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평화적 과정을 실행하는 공동체가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동체가 도달한 평화의 수준과 단계, 그리고 구성원들의 성찰과 결정에 따라 첨삭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평화연구의 시각에서 가장 일반적인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그중 첫째는 평화적 관계다. 둘째는 평화적 구조고, 셋째는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이다. 넷째는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의 지속성이다.
먼저 평화적 관계를 생각해 보자. 관계는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적 관계의 토대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평화적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힘이 개입되지 않은, 다른 말로 힘이 관계를 규정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음으로써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말한다. 차이가 힘의 차이로 변형되거나 폭력 발생의 빌미가 되지 않고 각 주체의 특성으로 그대로 인정되는 관계다. 구성원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이런 관계가 평화적 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로 평화적 구조는 모든 구성원들의 필요가 동등하게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고 논의되는 구조를 말한다. 결정 구조에 구성원들의 참여가 투명하고 열린 형태로 보장되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구조는 결정권의 공유, 다른 말로 결정권한의 분배를 통해 가능해진다. 동시에 구성원들의 의견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수렴되고 반영되는 합의 구조를 통해 가능해진다.
셋째로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은 문제 또는 갈등의 발생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폭력성을 감소시키는 변화의 기회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런 태도에 기초해 문제나 갈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대화와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해결 과정에서는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각자의 필요가 수렴돼야 한다. 권한을 가진 누군가의 일방적 결정이나 강요가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의 결정과 합의에 의해 문제와 갈등이 해결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얘기한 것들의 지속성이다. 평화적 공동체는 한두 가지 사건의 결과로 인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 방식이 지속되고 공동체 내 문화로 자리잡을 때 만들어진다. 평화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지속성을 가지느냐가 평화적 공동체의 최종 성취 여부를 결정한다.
종교공동체와 평화성
종교공동체는 대체로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라는 언어를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이고 선언적으로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존중, 배려, 돌봄, 이해, 용서, 화해 등을 강조한다. 그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니 적극 수용할 것을 독려한다. 이런 가치는 종교공동체 안만 아니라 밖도 향하며 평화의 가치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모든 종교공동체는 평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적극적으로 지지 또는 포용한다. 나아가 종교 자체가 평화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종교공동체의 이런 태도와 이해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종교공동체와 비종교공동체가 평화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화 실현을 위한 공동의 기반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 시대에 인류가 직면한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종교공동체들이 평화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종교공동체는 정말 평화적 본성, 다시 말해 평화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 진단을 위해서는 종교의 가르침 중 평화와 관련된 것들을 분류하고 그것이 실제로 종교공동체에서 작동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범위를 좁혀 평화의 시각, 즉 앞에서 얘기한 평화적 공동체의 조건을 대비시켜 생각해보기로 한다. 또한 필자가 잘 알고 있는 개신교 공동체에 국한해서 성찰해보기로 한다.
개신교 공동체,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는 평화와 화평이다. 의미는 같다. 그렇지만 교회공동체가 그것을 심각하게 정체성을 좌우하는 가치로 삼고 실제 공동체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지는 의문이다. 교회공동체는 성서의 기준을 적용해 조금 다른 판단을 할 수 있겠으나 평화의 시각으로 판단해보면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
먼저 평화적 관계의 조건부터 살펴보자. 교회공동체는 이에 대해 교회 밖 공동체와 특별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상호 배려와 도움, 그리고 굳이 옳음과 그름을 따지지 않는 이해와 용서 등을 신앙적 가르침과 연결시켜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성원들의 관계는 평화의 시각에서 봤을 때 평화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화적 관계는 힘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관계다. 그런데 교회공동체 조직은 상당히 위계적이다. 직책에 따라 위계가 결정되고 명령체계가 갖춰져 있다. 특별히 목회자와 당회를 중심으로 한 최고결정기구의 힘은 어떤 도전이나 저항도 허용하지 않으며 거기에 속한 사람들 각자가 교회공동체 내 다른 구성원들과 맺는 관계는 직책의 힘에 의존하는 관계다. 이렇게 힘에 의존한 관계 맺기는 다른 직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도 적용되고 교회공동체에 의해 오히려 독려된다. 조직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이런 관계가 폭력적이고 때로 폭력적 관계의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그것에 민감하게 대응하지도 변화를 모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질서를 통해 교회공동체 조직을 더 강화시키고 성장을 도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때문에 폭력적 관계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둘째로 평화적 조직의 조건을 살펴보자. 평화적 조직은 결정권한이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최종 결정에 모두의 목소리가 반영되며, 나아가 모두의 합의로 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를 말한다. 교회공동체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취약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소수에게 모든 결정권이 집중돼 있고, 심지어 성직자 한 사람이 결정권을 독점하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역시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공동체의 특성상 성직자에게 독점적인 권한이 부여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구성원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교회공동체가 순수한 종교공동체의 성격과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회조직으로서의 성격과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조직 운영은 합리적이지 않고 정당성도 없다. 물론 폭력적이기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공동체는 평화적 조직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많은 교회공동체의 문제해결 방식은 위계질서에 기대는 방식이다. 그것은 문제를 제기하거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특정 구성원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필요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결정권한을 지닌 소수가 결정한 해결책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강조해 상호 이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에는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한국문화의 집단의식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때로는 피해자에게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도 연출된다. 평화적 문제(갈등)해결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지속성의 조건을 보자. 위의 조건들을 살펴보면 지속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회공동체는 문제가 없을 때는 제법 평화로운 겉모습을 유지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힘에 의존한 관계지만 거기에는 상호 이해와 배려가 내포돼 있고, 소수에 의한 공동체 운영이지만 다수의 구성원들이 기꺼이 그런 방식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우연과 행운일 뿐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폭력적 관계와 구조, 그리고 문제해결 방식은 내.외부에서 오는 도전에 직면했을 때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결과 교회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결과까지 낳기 때문이다. 결국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 방식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교회공동체는 불안정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폭력에 의한 희생이 발생한다.
공식적으로 평화를 지지하고 평화적 공동체임을 자처하지만 평화성을 갖추지 못한 교회공동체의 문제는 내부에 머물지 않고 교회공동체의 사회적 존재의 의미와 한계로 연결된다. 가장 큰 한계는 자기 공동체 밖의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들은 주변의 다른 교회공동체들을 경쟁자로 여긴다. 같은 교단에 속해 있어도 큰 교회공동체가 작은 교회공동체의 유지와 생존을 외면한다. 이웃 종교의 배제와 적대시는 더욱 강하다. 조직으로서 교회공동체의 기본 관심은 내부 결속과 내부 성장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내부 공동체의 평화성을 낮추고 폭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교회공동체는 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다. 평화의 시각으로 봤을 때 부족한 점이 많지만 물론 교회공동체도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교회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돌봄과 밖에서의 이웃 돌봄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 또한 대부분 ‘선교’라는 종교적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평화의 가치 및 태도와 선명하게 구분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교회공동체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고 연대를 형성해 사회와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폭력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화 시대,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역할
세계화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앞으로도 세계화는 최고 수준을 유지하면서 지속될 것이다. 세계화는 긍정적 영향과 함께 많은 부정적 영향도 낳고 있다.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긍정적 영향은 차치하고 부정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불가피하게 전 세계 개인 및 집단의 공동 대응을 언급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를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 세계 시민사회라는 공동체고 그에 대한 소속감이다. 이것은 각 개인과 집단이 자기 공동체를 넘어 다른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계속 확장시켜갈 때 가능한 일이다. 이때 필요한 기본적 가치와 태도가 바로 평화성이다. 비록 ‘평화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맺는 방식과 관계의 성격은 ‘평화성’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와 공동체가 서로를 연결하고, 공동 역량을 찾고, 공동 대응책을 논의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배려, 공동 결정과 합의의 방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평화성은 앞에서 얘기한 종교공동체 내의 평화성과 다르지 않다. 종교공동체 내에서 평화적 관계와 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평화성은 종교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는 큰 사회 및 국가, 그리고 전 세계 다른 종교 및 비종교공동체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 작업을 할 때도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화 시대에 종교공동체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평화성이 없다면 그 잠재성을 발휘할 기회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공동 대응을 요구하는 세계적 문제들을 몇 가지만 추려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빈곤을 심화시키는 불공정한 부의 분배와 기후변화를 심화시키는 지구온난화를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로 꼽는다. 신자유주의의 고착, 금융자본의 세계화, 생산 및 소비의 세계화 등으로 인해 세계시장을 상대하는 부자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세계화로 일자리와 소득이 불안정해진 빈자들은 노동시간은 늘었지만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다. 공동으로 만든 부가 부자에게만 집중되고 빈자는 공정한 분배에서 소외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증가와 자연환경의 피폐화는 빈국과 빈자들의 희생을 야기하고 있다. 때문에 기후적응의 양극화와 기후정의 문제가 심각한 현안이 되고 있다. 이런 부의 분배와 지구온난화는 해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문제로 여겨져 현실적인 선택으로 대응 방법에 더 초점이 맞춰져 논의되고 있다. 또 다른 큰 문제는 IS 등 극단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확산과 테러의 세계화다. 이 문제는 한편으로 사회의 폭력적 구조, 빈부 격차, 차별, 소외 등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작년 11월 프랑스 파리, 그리고 올해 3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일어난 테러는 종교근본주의, 테러, 폭력적 국가사회 및 국제사회 구조, 부의 분배, 차별과 소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테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역할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종교공동체가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교공동체, 특별히 한국의 종교공동체가 국내 및 세계의 다른 종교 및 비종교공동체들과 이런 문제들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평화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평화적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량이 부족한 종교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고 평화적 논의와 합의 구조를 만들고 실질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종교적 판단과 접근을 넘어서 희생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들 모두와 연대하면서 상향식 접근에 기초한 공동 대응을 모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감스럽지만 한국의 종교공동체는 아직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세계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가능성이 낮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교회공동체는 그렇다. 때문에 당장의 행동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특별히 이 글의 중심 논의인 평화성과 관련해서 말이다.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을 모색하는데 핵심이 됨과 동시에 상호 연결된 두 개의 키워드는 평화적 종교공동체를 위한 역량 형성과 구조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을 떠받치는 하나의 키워드는 종교공동체 구성원들이다.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주체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하고 때문에 그들의 역량이 우선적으로 키워져야 한다. 소수의 성직자나 지도자가 아니라 구성원들 각자, 그리고 그들의 집단적 역량을 키우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교육과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스스로 종교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맺기 방식, 구조, 문제해결 문화 등을 평가하고 평화적 종교공동체를 위한 방향과 방식을 고민할 수 있게 독려해야 한다. 동시에 대화와 합의의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이 분산되고 공유되는 구조를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결정 구조에 성직자 및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참여자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개별 종교공동체 차원의 구조가 교단이나 종단에도 똑 같이 적용돼야 한다. 그래야만 위계적 문화와 소수집단 결정 구조가 극복될 수 있고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종교공동체는 자기 공동체 밖, 나아가 한국사회 밖에 있는 다양한 개인 및 집단과도 평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계시민을 길러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과 윤리에 기초해 세계화가 야기한 문제와 세계가 공동 대응해야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는 세계시민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종교적, 민족적 범위를 넘어서는 인도적, 인권적 접근을 강조해야 한다. 종교적, 민족적 잣대가 아닌 보편적인 인도적, 인권적 기준을 통해 세계가 직면한 폭력, 부정의, 희생의 문제에 접근하는 세계시민을 키워야 한다. 자기 종교, 민족,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은 세계화 시대에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희생을 증가시키는 데만 기여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 종교공동체는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종교공동체들과 교류 및 연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수 성직자 및 지도자들의 교류 및 연대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교류 및 연대가 돼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를 넘어 이웃종교와 교류하고 범종교공동체까지 형성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비전과 실행을 위한 동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접근을 통해 세계화의 부정적 영향을 축소시키고 긍정적 영향을 확대시킬 종교공동체의 잠재성이 개발돼야 한다.
종교공동체가 반드시 평화성을 수용해야 하고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관계, 구조, 문화에서 폭력적 요소가 사라진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모습은 종교공동체가 지양하는 보편적 가치 및 기준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 표현이 다를 뿐이다. 나아가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긍정적 역할을 모색하고 실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거부할 이유도 없다. 평화성은 그런 종교공동체를 위한 논의와 탐색의 토대가 될 수 있다.
* 위 글은 2016년 4월 5일 레페스포럼에서 발제한 것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평화의 공동체성
평화를 논할 때 주목해야 할 두 단어는 관계와 공동체다. 평화는 관계 속에서 정의되기 때문이고 평화가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공동체기 때문이다. 관계를 성찰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평화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없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평화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없다. 관계는 평화의 기본적인 조건이고 공동체는 관계의 결과이자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먼저 관계를 살펴보자. 관계는 평화의 존재 여부와 질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요소다. 평화는 이론적으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에서 성취된다. 이것은 곧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물리적 힘을 이용해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적극적 평화의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물리적 폭력의 부재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화적 폭력까지 없어야 최종적으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평화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관계 속에서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구조와 문화를 이용한 어떤 폭력도 가하지 않을 때, 다른 말로 누구도 구조적, 문화적 폭력에 희생되지 않을 때 평화가 성취될 수 있다. 평화가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계의 주체는 다양하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집단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도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관계는 서로 다른 주체들 사이에 만들어지고 각 주체는 자기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들의 서로 다른 점을 우리는 보통 ‘차이’라고 부른다.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때로 그것은 힘의 관계를 만드는 ‘핑계’ 또는 ‘합리적 이유’가 된다. 보통 한 주체가 다른 주체와의 관계에서 자기 이익을 취하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이런 힘의 관계를 만들고 강화시킨다. 관계에 힘이 개입하고 힘에 의해 관계의 성격이 규정되면 그 관계는 폭력적이 된다. 이런 힘의 관계, 다른 말로 폭력적 관계에서는 어떤 평화도 가능하지 않고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 상대적 약자의 저항으로 인해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힘이 개입되지 않는 관계에서는 평화가 성취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관계는 공동체의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제 공동체를 살펴보자.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작은 규모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연대를 통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여러 형태의 공동사회를 말한다. 지리적, 또는 비지리적 공동체 모두를 포함하며 작은 집단부터 국가사회와 심지어 국제 공동체(international community)까지를 아우른다. 규모가 어찌됐든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관계에 기초해서 형성되고 유지된다. 다양한 구성원들과 그들 사이 관계들이 존재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재가 가능해진다. 평화가 목표로 삼는 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평화적 관계에 기초해 만들어지는 평화적 공동체다. 동시에 구성원들 사이 평화적 관계의 유지에 기여하는 공동체다.
평화적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가 성취된 공동체를 말한다. 외부 상황이 어떻든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만은 소극적, 적극적 평화가 성취된 공동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내에 물리적 폭력은 물론 구조적, 문화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쉽지도 않다. 공동체의 규모가 크고, 구성원들이 다양하고, 그들의 관계가 복잡할수록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평화의 성취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현 상황(status quo)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안에서 이익을 얻는 다양한 주체들에 도전하며, 무엇보다 폭력에 희생되는 주체들의 각성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수 년, 또는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평화는 '성취‘라는 최종 목표보다 성취를 향해하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춘다. 과정 속에서 평화의 조건을 충족시켜가기 위해 점진적으로 관계를 변화시키고, 사회 구조 및 환경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상호작용, 연대, 타협, 합의 등에 초점을 맞춘다. 과정 자체가 평화로워야 평화의 성취 가능성이 높아지고 각 결과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으로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를 완전히 성취한 공동체라기보다 평화 성취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평화적 과정을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평화적 과정을 실행하는 공동체가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동체가 도달한 평화의 수준과 단계, 그리고 구성원들의 성찰과 결정에 따라 첨삭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평화연구의 시각에서 가장 일반적인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그중 첫째는 평화적 관계다. 둘째는 평화적 구조고, 셋째는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이다. 넷째는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의 지속성이다.
먼저 평화적 관계를 생각해 보자. 관계는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적 관계의 토대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평화적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힘이 개입되지 않은, 다른 말로 힘이 관계를 규정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음으로써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말한다. 차이가 힘의 차이로 변형되거나 폭력 발생의 빌미가 되지 않고 각 주체의 특성으로 그대로 인정되는 관계다. 구성원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이런 관계가 평화적 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로 평화적 구조는 모든 구성원들의 필요가 동등하게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고 논의되는 구조를 말한다. 결정 구조에 구성원들의 참여가 투명하고 열린 형태로 보장되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구조는 결정권의 공유, 다른 말로 결정권한의 분배를 통해 가능해진다. 동시에 구성원들의 의견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수렴되고 반영되는 합의 구조를 통해 가능해진다.
셋째로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은 문제 또는 갈등의 발생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폭력성을 감소시키는 변화의 기회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런 태도에 기초해 문제나 갈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대화와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해결 과정에서는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각자의 필요가 수렴돼야 한다. 권한을 가진 누군가의 일방적 결정이나 강요가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의 결정과 합의에 의해 문제와 갈등이 해결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얘기한 것들의 지속성이다. 평화적 공동체는 한두 가지 사건의 결과로 인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적 공동체는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 방식이 지속되고 공동체 내 문화로 자리잡을 때 만들어진다. 평화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지속성을 가지느냐가 평화적 공동체의 최종 성취 여부를 결정한다.
종교공동체와 평화성
종교공동체는 대체로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라는 언어를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이고 선언적으로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존중, 배려, 돌봄, 이해, 용서, 화해 등을 강조한다. 그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니 적극 수용할 것을 독려한다. 이런 가치는 종교공동체 안만 아니라 밖도 향하며 평화의 가치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모든 종교공동체는 평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적극적으로 지지 또는 포용한다. 나아가 종교 자체가 평화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종교공동체의 이런 태도와 이해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종교공동체와 비종교공동체가 평화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화 실현을 위한 공동의 기반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 시대에 인류가 직면한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종교공동체들이 평화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종교공동체는 정말 평화적 본성, 다시 말해 평화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 진단을 위해서는 종교의 가르침 중 평화와 관련된 것들을 분류하고 그것이 실제로 종교공동체에서 작동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범위를 좁혀 평화의 시각, 즉 앞에서 얘기한 평화적 공동체의 조건을 대비시켜 생각해보기로 한다. 또한 필자가 잘 알고 있는 개신교 공동체에 국한해서 성찰해보기로 한다.
개신교 공동체,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는 평화와 화평이다. 의미는 같다. 그렇지만 교회공동체가 그것을 심각하게 정체성을 좌우하는 가치로 삼고 실제 공동체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지는 의문이다. 교회공동체는 성서의 기준을 적용해 조금 다른 판단을 할 수 있겠으나 평화의 시각으로 판단해보면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
먼저 평화적 관계의 조건부터 살펴보자. 교회공동체는 이에 대해 교회 밖 공동체와 특별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상호 배려와 도움, 그리고 굳이 옳음과 그름을 따지지 않는 이해와 용서 등을 신앙적 가르침과 연결시켜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성원들의 관계는 평화의 시각에서 봤을 때 평화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화적 관계는 힘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관계다. 그런데 교회공동체 조직은 상당히 위계적이다. 직책에 따라 위계가 결정되고 명령체계가 갖춰져 있다. 특별히 목회자와 당회를 중심으로 한 최고결정기구의 힘은 어떤 도전이나 저항도 허용하지 않으며 거기에 속한 사람들 각자가 교회공동체 내 다른 구성원들과 맺는 관계는 직책의 힘에 의존하는 관계다. 이렇게 힘에 의존한 관계 맺기는 다른 직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도 적용되고 교회공동체에 의해 오히려 독려된다. 조직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이런 관계가 폭력적이고 때로 폭력적 관계의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그것에 민감하게 대응하지도 변화를 모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질서를 통해 교회공동체 조직을 더 강화시키고 성장을 도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때문에 폭력적 관계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둘째로 평화적 조직의 조건을 살펴보자. 평화적 조직은 결정권한이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최종 결정에 모두의 목소리가 반영되며, 나아가 모두의 합의로 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를 말한다. 교회공동체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취약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소수에게 모든 결정권이 집중돼 있고, 심지어 성직자 한 사람이 결정권을 독점하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역시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공동체의 특성상 성직자에게 독점적인 권한이 부여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구성원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교회공동체가 순수한 종교공동체의 성격과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회조직으로서의 성격과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조직 운영은 합리적이지 않고 정당성도 없다. 물론 폭력적이기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공동체는 평화적 조직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평화적 문제(갈등)해결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많은 교회공동체의 문제해결 방식은 위계질서에 기대는 방식이다. 그것은 문제를 제기하거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특정 구성원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필요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결정권한을 지닌 소수가 결정한 해결책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강조해 상호 이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에는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한국문화의 집단의식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때로는 피해자에게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도 연출된다. 평화적 문제(갈등)해결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지속성의 조건을 보자. 위의 조건들을 살펴보면 지속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회공동체는 문제가 없을 때는 제법 평화로운 겉모습을 유지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힘에 의존한 관계지만 거기에는 상호 이해와 배려가 내포돼 있고, 소수에 의한 공동체 운영이지만 다수의 구성원들이 기꺼이 그런 방식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우연과 행운일 뿐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폭력적 관계와 구조, 그리고 문제해결 방식은 내.외부에서 오는 도전에 직면했을 때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결과 교회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결과까지 낳기 때문이다. 결국 평화적 관계, 구조, 문제해결 방식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교회공동체는 불안정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폭력에 의한 희생이 발생한다.
공식적으로 평화를 지지하고 평화적 공동체임을 자처하지만 평화성을 갖추지 못한 교회공동체의 문제는 내부에 머물지 않고 교회공동체의 사회적 존재의 의미와 한계로 연결된다. 가장 큰 한계는 자기 공동체 밖의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들은 주변의 다른 교회공동체들을 경쟁자로 여긴다. 같은 교단에 속해 있어도 큰 교회공동체가 작은 교회공동체의 유지와 생존을 외면한다. 이웃 종교의 배제와 적대시는 더욱 강하다. 조직으로서 교회공동체의 기본 관심은 내부 결속과 내부 성장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내부 공동체의 평화성을 낮추고 폭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교회공동체는 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다. 평화의 시각으로 봤을 때 부족한 점이 많지만 물론 교회공동체도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교회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돌봄과 밖에서의 이웃 돌봄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 또한 대부분 ‘선교’라는 종교적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평화의 가치 및 태도와 선명하게 구분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교회공동체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고 연대를 형성해 사회와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폭력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화 시대,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역할
세계화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앞으로도 세계화는 최고 수준을 유지하면서 지속될 것이다. 세계화는 긍정적 영향과 함께 많은 부정적 영향도 낳고 있다.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긍정적 영향은 차치하고 부정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불가피하게 전 세계 개인 및 집단의 공동 대응을 언급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를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 세계 시민사회라는 공동체고 그에 대한 소속감이다. 이것은 각 개인과 집단이 자기 공동체를 넘어 다른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계속 확장시켜갈 때 가능한 일이다. 이때 필요한 기본적 가치와 태도가 바로 평화성이다. 비록 ‘평화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맺는 방식과 관계의 성격은 ‘평화성’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와 공동체가 서로를 연결하고, 공동 역량을 찾고, 공동 대응책을 논의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배려, 공동 결정과 합의의 방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평화성은 앞에서 얘기한 종교공동체 내의 평화성과 다르지 않다. 종교공동체 내에서 평화적 관계와 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평화성은 종교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는 큰 사회 및 국가, 그리고 전 세계 다른 종교 및 비종교공동체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 작업을 할 때도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화 시대에 종교공동체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평화성이 없다면 그 잠재성을 발휘할 기회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공동 대응을 요구하는 세계적 문제들을 몇 가지만 추려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빈곤을 심화시키는 불공정한 부의 분배와 기후변화를 심화시키는 지구온난화를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로 꼽는다. 신자유주의의 고착, 금융자본의 세계화, 생산 및 소비의 세계화 등으로 인해 세계시장을 상대하는 부자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세계화로 일자리와 소득이 불안정해진 빈자들은 노동시간은 늘었지만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다. 공동으로 만든 부가 부자에게만 집중되고 빈자는 공정한 분배에서 소외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증가와 자연환경의 피폐화는 빈국과 빈자들의 희생을 야기하고 있다. 때문에 기후적응의 양극화와 기후정의 문제가 심각한 현안이 되고 있다. 이런 부의 분배와 지구온난화는 해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문제로 여겨져 현실적인 선택으로 대응 방법에 더 초점이 맞춰져 논의되고 있다. 또 다른 큰 문제는 IS 등 극단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확산과 테러의 세계화다. 이 문제는 한편으로 사회의 폭력적 구조, 빈부 격차, 차별, 소외 등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작년 11월 프랑스 파리, 그리고 올해 3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일어난 테러는 종교근본주의, 테러, 폭력적 국가사회 및 국제사회 구조, 부의 분배, 차별과 소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테러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역할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종교공동체가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교공동체, 특별히 한국의 종교공동체가 국내 및 세계의 다른 종교 및 비종교공동체들과 이런 문제들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평화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평화적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량이 부족한 종교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과 평화적 관계를 맺고 평화적 논의와 합의 구조를 만들고 실질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종교적 판단과 접근을 넘어서 희생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들 모두와 연대하면서 상향식 접근에 기초한 공동 대응을 모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감스럽지만 한국의 종교공동체는 아직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세계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가능성이 낮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교회공동체는 그렇다. 때문에 당장의 행동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특별히 이 글의 중심 논의인 평화성과 관련해서 말이다.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을 모색하는데 핵심이 됨과 동시에 상호 연결된 두 개의 키워드는 평화적 종교공동체를 위한 역량 형성과 구조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을 떠받치는 하나의 키워드는 종교공동체 구성원들이다.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주체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하고 때문에 그들의 역량이 우선적으로 키워져야 한다. 소수의 성직자나 지도자가 아니라 구성원들 각자, 그리고 그들의 집단적 역량을 키우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교육과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스스로 종교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맺기 방식, 구조, 문제해결 문화 등을 평가하고 평화적 종교공동체를 위한 방향과 방식을 고민할 수 있게 독려해야 한다. 동시에 대화와 합의의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이 분산되고 공유되는 구조를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결정 구조에 성직자 및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참여자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개별 종교공동체 차원의 구조가 교단이나 종단에도 똑 같이 적용돼야 한다. 그래야만 위계적 문화와 소수집단 결정 구조가 극복될 수 있고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종교공동체는 자기 공동체 밖, 나아가 한국사회 밖에 있는 다양한 개인 및 집단과도 평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계시민을 길러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과 윤리에 기초해 세계화가 야기한 문제와 세계가 공동 대응해야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는 세계시민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종교적, 민족적 범위를 넘어서는 인도적, 인권적 접근을 강조해야 한다. 종교적, 민족적 잣대가 아닌 보편적인 인도적, 인권적 기준을 통해 세계가 직면한 폭력, 부정의, 희생의 문제에 접근하는 세계시민을 키워야 한다. 자기 종교, 민족,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은 세계화 시대에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희생을 증가시키는 데만 기여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 종교공동체는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종교공동체들과 교류 및 연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수 성직자 및 지도자들의 교류 및 연대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교류 및 연대가 돼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를 넘어 이웃종교와 교류하고 범종교공동체까지 형성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비전과 실행을 위한 동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접근을 통해 세계화의 부정적 영향을 축소시키고 긍정적 영향을 확대시킬 종교공동체의 잠재성이 개발돼야 한다.
종교공동체가 반드시 평화성을 수용해야 하고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관계, 구조, 문화에서 폭력적 요소가 사라진 평화적 종교공동체의 모습은 종교공동체가 지양하는 보편적 가치 및 기준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 표현이 다를 뿐이다. 나아가 평화적 종교공동체가 세계화 시대 종교공동체의 긍정적 역할을 모색하고 실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거부할 이유도 없다. 평화성은 그런 종교공동체를 위한 논의와 탐색의 토대가 될 수 있다.
* 위 글은 2016년 4월 5일 레페스포럼에서 발제한 것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 반드시 저자와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