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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평화의 사회적 지표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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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이론적으로 소극적(negative) 평화와 적극적(positive) 평화로 구분된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수단을 통해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인 직접적(direct) 폭력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하고, 적극적 평화는 구조적(structural) 폭력과 문화적(cultural) 폭력까지 포함해 모든 폭력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한다. 평화학 학제 안에서 평화를 연구하는 평화학자들, 평화 활동가들, 그리고 다른 학제에서 융합 접근으로 평화를 연구하는 평화연구자들 모두 이런 이론적 구분을 따른다. 이들이 평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단지 이론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근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각자의 사회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이는 평화 연구 및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와 닿아 있다. 모든 평화 연구와 활동의 목표는 이론적 탐구, 사례 연구, 현장 적용 등을 통해 사회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사회는 모든 형태의 폭력이 고착되어 있어서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심각한 폭력의 피해에 노출된 사회다. 평화 연구 및 활동은 이런 사회의 변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폭력적 사회를 구성하는 현상과 문제, 가해와 피해를 규명하고 평화적 사회로의 점진적 변화를 위해 구체적인 접근과 행위자를 확인하는 일을 한다. 이런 실행의 토대가 되는 것이 소극적 평화, 적극적 평화에 대한 이론적 이해다. 동시에 이론적 이해를 현실 사회에 반영해 해석하고 구체적 변화의 목표를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달성하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실행을 통해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의 이론, 그리고 연구 및 활동은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소극적 평화는 평화 연구 초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주로 전쟁과 관련해 이해됐다. 당시 연구자들은 전쟁 예방을 평화 연구가 다뤄야 할 핵심 주제로 여겼다. 연구의 목표인 전쟁 부재를 ‘소극적’ 평화라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요한 갈퉁이 여기에 소극적 평화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그는 적극적 평화의 개념 또한 제시했다. 전쟁 예방에 주력했던 당시의 많은 연구자가 갈퉁의 이런 이론적 제안을 비판했다. 2차 세계대전의 악몽과 후유증, 그리고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팽배했던 당시 상황에서 전쟁 예방은 중대하고 긴급한 문제였고 평화 연구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퉁이 전쟁 예방 같은 국제 평화를 ‘소극적 평화’로 부르면서 폄하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다른 한편의 연구자들은 전쟁 연구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사회 정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정주진 지음(2022) <평화학> pp.39-40 참고). 이들은 평화 연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건 적극적 평화고 소극적 평화에 주력하는 건 결국 진정한 평화의 실현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무력 충돌과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문제를 간과해 소극적 평화조차 가능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의 개념은 평화를 규정하는 이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극적 평화는 흔히 무력 충돌이나 큰 규모의 전쟁이 부재한 상황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사실 소극적 평화는 이를 넘어서 무력 충돌의 가능성과 전쟁의 위험까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 도중의 일시적 휴전 상태를 소극적 평화가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없고, 무력 충돌은 없으나 적대적 관계, 무력 경쟁, 상호 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을 소극적 평화 상태로 볼 수도 없다. 소극적 평화는 그러므로 무력 경쟁의 중단과 적대관계의 변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사회의 안전을 무력에 맡기는 사회 구조와 무력을 통한 평화를 지지하는 사회 문화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소극적 평화가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접근과 노력으로만 가능함을 말해준다. 적극적 평화는 전쟁과 물리적 폭력이 부재하는 소극적 평화의 목표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극적 평화의 목표는 적극적 평화의 목표와 결합하고 단계적 과정을 거쳐 실행될 수밖에 없다.

 

적극적 평화의 핵심 주제는 폭력적 구조와 그것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폭력적 문화의 규명이다. 적극적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제거하고 나아가 폭력적 사회를 변화시킬 구체적 방법을 모색해야 하며 변화를 실현할 행위자를 발굴하고 지지하고 독려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과의 공감대 형성과 공동 노력이 불가피하다. 소수의 연구와 실행, 주장과 설득으로 사회 변화가 가능하지 않고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서만 바람직한 변화가 가능하고 변화의 지속성이 담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도전적인 일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적극적 평화 실현이 흔히 학문적 연구 또는 일부 사회 운동 영역의 담론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즉 사회 구성원들은 그것을 현실 문제와 밀착되어 있는 중요하고 긴급한 개인적, 사회적 사안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폭력적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공감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대한 불신 내지 포기는 장기간의 반복적인 경험에 의한 합리적 판단이자 생존을 위한 유연성 있는 태도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므로 폭력적 사회에서 평화적 사회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평화 현안 및 변화 주제를 개인 및 사회의 일상과 구체적으로 연결해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화적 사회로의 변화 주제와 현안을 개인 및 사회와 연결해 재해석하는 데 있어서 참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표가 있다. Institute for Economics and Peace가 개발한 Indicators of Positive Peace로 PPI라고도 한다. 이 지표는 특히 전쟁이 부재하고 민주주의 사회임에도 평화롭지 않은, 즉 여전히 사회에 폭력적 구조와 문화, 그로 인한 가해와 피해가 존재하는 많은 사회의 변화 필요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지표들이 폭력적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변화가 이뤄진, 다시 말해 사회적 폭력이 제거되고 적극적 평화가 이뤄진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만하다.

 

출처: Charles Hauss (2019) From Conflict Resolution to Peacebuilding. Rowman & Littlefield, p.220.


PPI의 8가지 지표는 만족스럽게 작동하는 정부(well-functioning government), 공평한 자원 분배(equitable distribution of resources), 자유로운 정보 흐름(free flow of information), 주변국과의 좋은 관계(good relations with neighbors), 높은 수준의 인적 자본(high levels of human capital), 타자 권리의 승인(acceptance of the rights of other), 낮은 수준의 부패(low levels of corruption), 건전한 사업 환경(sound business environment) 등이다 (Charles Hauss(2019) <From Conflict Resolution to Peacebuidling> p.220 참고). 이 지표는 정치, 행정,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개인과 사회가 원하는 변화의 모습을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8가지 지표가 높은 수준이라면 적극적 평화가 어느 정도 실현된 사회이고 사회 안에서 개인과 집단이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표는 두 가지로 활용될 수 있다. 하나는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의 구체적 목표를 설정할 때 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체적 변화 모습을 제시함으로서 사회 구성원의 공감대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지표는 완벽하거나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 상황에 따라, 그리고 평화의 수준에 따라 다른 지표가 포함되거나 특정 지표가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 평화는 모든 사회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다. 적극적 평화의 성취는 곧 힘의 악용과 부정의에 의한 피해의 발생, 불평등과 착취, 일방적 정책 결정과 시민 배제 등이 존재하지 않고 부의 공정한 분배, 폭력적 구조와 문화의 부재, 시민 참여가 보장된 정책 결정과 실행, 개인 및 집단 사이 억압과 강요의 부재, 다양성의 존중과 독려 등이 존재하는,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적극적 평화의 성취를 위해서는 사회의 다양한 개인, 집단, 영역이 참여하는 통합적 노력과 장기간의 실행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과 실행의 가치와 필요는 궁극적 목표 달성 시점에서만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과정을 통해 폭력적 사회가 점진적으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의 삶도 점진적으로 변하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 이는 적극적 평화 성취를 사회적 목표로 설정하는 시점부터 변화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극적 평화는 목표 설정, 과정의 설계와 실행, 사회 구성원의 참여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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