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남쪽으로의 피란 ('허락되지 않은 기억' 사진전의 사진 중)
한국전쟁의 기억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이다. 해마다 6월이면 한국전쟁은 다시 기억되고 기념된다. 그런데 3년이 넘게 계속됐던 전쟁과 한반도 곳곳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 그리고 하루아침에 피란민이 되고 전쟁 한 가운데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불안과 고통의 삶을 잠깐의 기념으로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70년 이상이 지난 전쟁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고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희미해지는 노인이 됐다. 한국전쟁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 특히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에게는 알고 있는 여러 전쟁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이 오히려 더 생생할 수도 있다.
개인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한국전쟁의 기억이 거의 사라지거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기억되고 반복적으로 교육되는 데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가진 심각한 트라우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다르지만 북한은 동일 민족이었기에 ‘설마...’했는데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해방 후 자리도 잡지 못한 국가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공격받지 않아야 한다는 공포 섞인 트라우마 때문에 전쟁 이후 군비 강화와 국가안보는 문제 제기를 허락하지 않는 성역이 됐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경계가 사회적 신조처럼 자리를 잡았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비극이다.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겨우 일 년에 한 번 기억하고 기념하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건 사람이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실종된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 각자가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 인류 보편적으로 ‘악’으로 규정되고 절대 일어나서도 승인되어서도 안 되는 일로 여겨지는 이유 또한 전쟁으로 인해 생명의 손실과 삶의 파괴에 직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한국전쟁도 사람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사람이 전혀 기억되지 않는 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운 국인들과 먼 나라에서 와 참전한 유엔군의 공로는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기억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자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만 기억된다. 그들이 죽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겪었을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과 공포는 기억되지도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 사실 전혀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은 군인 사망보다 두 배 이상 많았고 실종과 행방불명은 9배 이상이나 됐다. 그러나 민간인 피해자는 공식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물론 전쟁은 항상 인명 손실을 낳고 민간인 사망 또한 모든 전쟁이 야기하는 피해다. 그러나 군인보다 훨씬 많은 피해자가 있었음에도 사회 차원에서 기억되지 않는 건 문제다. 전쟁 중에 민간인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고 민간인 피해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은 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한국전쟁 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곳곳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고 그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이었다. 한국을 돕겠다고 온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다. 전쟁 후 피해자들과 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청했지만 한국 사회와 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워서였는지 소극적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밝혀진 사례들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례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51년 2월에 있은 거창양민학살은 국군이 저지른 대표적인 학살 사건이다. 국군은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주민 570여 명을 학살했다. 그중 327명은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결정적으로 이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닷새 앞둔 1950년 9월 10일에 미 해병대는 월미도 일대를 폭격했고 주민 100명 정도가 희생됐다. 미군은 민간인 존재를 알면서도 폭격을 감행했다. 피해자들의 사건 규명 요청으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실을 규명했고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했다. 학살 후 58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1950년 7월 26-29일 충북 영동군 주곡리 주민들은 마을을 비우고 떠나라는 미군의 명령을 따랐다가 노근리 철교에서, 그리고 피신한 굴에서 미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주민 가운데 인민군이 숨어있다고 판단한 미군 지휘부가 피란민을 모두 적으로 취급해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50-3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바로 노근리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도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의 끈질긴 조사와 요청으로 진상 규명과 한국 및 미국 정부의 인정이 이뤄졌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경북 칠곡의 왜관철교 폭파로 역시 피란길에 올랐던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폭격이나 전투로 인해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은 그냥 군사 작전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여겨지고 죽은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래서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한으로 남은 많은 사건이 있다.
특히 북한군이 진군하고 다시 퇴각한 1950년 7월에서 10월까지 3개월 남짓한 기간에 한국 사회 곳곳의 마을들은 작은 전쟁을 치렀고 많은 민간인이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학살은 북한군은 물론 한국 경찰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북한군의 진격으로 철수해야 했던 경찰은 철수하기 전 좌익 성향 주민들을 학살했고, 진격한 북한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우익 성향 주민들을 학살하곤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좌익 또는 우익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목숨을 잃었다. 많은 민간인이 보호받지 못하고 후방에서 학살됐지만 이들 또한 기억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한국전쟁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트라우마고 아픈 기억이다. 그런데 그 트라우마와 기억이 국가의 안위와 안보를 위한 것에만 맞춰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무고하게 희생됐던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나 무력 충돌을 어떤 상황에서도 거부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을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 계속 고민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건 전쟁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일이고 그 이유는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설사 국익을 위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고, 사실 가장 큰 국익은 국민 생명의 보호다. 한국전쟁도 그런 파괴적 전쟁 중 하나로 기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호받아야 했지만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 위 글은 '월간 법무사"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의 피란 ('허락되지 않은 기억' 사진전의 사진 중)
한국전쟁의 기억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이다. 해마다 6월이면 한국전쟁은 다시 기억되고 기념된다. 그런데 3년이 넘게 계속됐던 전쟁과 한반도 곳곳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 그리고 하루아침에 피란민이 되고 전쟁 한 가운데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불안과 고통의 삶을 잠깐의 기념으로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70년 이상이 지난 전쟁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고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희미해지는 노인이 됐다. 한국전쟁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 특히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에게는 알고 있는 여러 전쟁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이 오히려 더 생생할 수도 있다.
개인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한국전쟁의 기억이 거의 사라지거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기억되고 반복적으로 교육되는 데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가진 심각한 트라우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다르지만 북한은 동일 민족이었기에 ‘설마...’했는데 공격을 받았고 그래서 해방 후 자리도 잡지 못한 국가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공격받지 않아야 한다는 공포 섞인 트라우마 때문에 전쟁 이후 군비 강화와 국가안보는 문제 제기를 허락하지 않는 성역이 됐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경계가 사회적 신조처럼 자리를 잡았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비극이다.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겨우 일 년에 한 번 기억하고 기념하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건 사람이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실종된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 각자가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 인류 보편적으로 ‘악’으로 규정되고 절대 일어나서도 승인되어서도 안 되는 일로 여겨지는 이유 또한 전쟁으로 인해 생명의 손실과 삶의 파괴에 직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한국전쟁도 사람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사람이 전혀 기억되지 않는 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운 국인들과 먼 나라에서 와 참전한 유엔군의 공로는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기억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자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만 기억된다. 그들이 죽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겪었을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과 공포는 기억되지도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 사실 전혀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은 군인 사망보다 두 배 이상 많았고 실종과 행방불명은 9배 이상이나 됐다. 그러나 민간인 피해자는 공식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물론 전쟁은 항상 인명 손실을 낳고 민간인 사망 또한 모든 전쟁이 야기하는 피해다. 그러나 군인보다 훨씬 많은 피해자가 있었음에도 사회 차원에서 기억되지 않는 건 문제다. 전쟁 중에 민간인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고 민간인 피해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은 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한국전쟁 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곳곳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고 그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이었다. 한국을 돕겠다고 온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다. 전쟁 후 피해자들과 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청했지만 한국 사회와 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워서였는지 소극적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당사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밝혀진 사례들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례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51년 2월에 있은 거창양민학살은 국군이 저지른 대표적인 학살 사건이다. 국군은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주민 570여 명을 학살했다. 그중 327명은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결정적으로 이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닷새 앞둔 1950년 9월 10일에 미 해병대는 월미도 일대를 폭격했고 주민 100명 정도가 희생됐다. 미군은 민간인 존재를 알면서도 폭격을 감행했다. 피해자들의 사건 규명 요청으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실을 규명했고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했다. 학살 후 58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1950년 7월 26-29일 충북 영동군 주곡리 주민들은 마을을 비우고 떠나라는 미군의 명령을 따랐다가 노근리 철교에서, 그리고 피신한 굴에서 미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주민 가운데 인민군이 숨어있다고 판단한 미군 지휘부가 피란민을 모두 적으로 취급해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50-3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바로 노근리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도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의 끈질긴 조사와 요청으로 진상 규명과 한국 및 미국 정부의 인정이 이뤄졌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경북 칠곡의 왜관철교 폭파로 역시 피란길에 올랐던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폭격이나 전투로 인해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은 그냥 군사 작전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여겨지고 죽은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래서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한으로 남은 많은 사건이 있다.
특히 북한군이 진군하고 다시 퇴각한 1950년 7월에서 10월까지 3개월 남짓한 기간에 한국 사회 곳곳의 마을들은 작은 전쟁을 치렀고 많은 민간인이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학살은 북한군은 물론 한국 경찰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북한군의 진격으로 철수해야 했던 경찰은 철수하기 전 좌익 성향 주민들을 학살했고, 진격한 북한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우익 성향 주민들을 학살하곤 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좌익 또는 우익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목숨을 잃었다. 많은 민간인이 보호받지 못하고 후방에서 학살됐지만 이들 또한 기억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한국전쟁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트라우마고 아픈 기억이다. 그런데 그 트라우마와 기억이 국가의 안위와 안보를 위한 것에만 맞춰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무고하게 희생됐던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나 무력 충돌을 어떤 상황에서도 거부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을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 계속 고민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건 전쟁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일이고 그 이유는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설사 국익을 위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고, 사실 가장 큰 국익은 국민 생명의 보호다. 한국전쟁도 그런 파괴적 전쟁 중 하나로 기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호받아야 했지만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 기억되어야 한다.
* 위 글은 '월간 법무사"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