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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전성시대

201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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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향하는 폭력  

남자는 여자를, 청년세대는 노인세대를,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한국인은 외국인들을 미워한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미움을 넘어 혐오한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혐오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그 와중에 생긴 사건이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한 남자가 우연히 본 여자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 다른 이유들이 더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성을 혐오한 남자의 소행이다. 그런데 살해된 여성을 추모하는 공간에 근조 화환이 도착했단다.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커다란 리본을 단 화환이었다. 천안함 기념식에 갔으면 모를까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화환을 보낸 사람은 추모 상황을 비꼬고 여성 혐오를 제법 '그럴듯하게' 표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인도적, 비윤리적, 폭력적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보통 약자 코스프레를 한다. 혐오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세계, 생활, 그리고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억울함'과 '어려움' 때문에 혐오를 강하게 표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약자라면 감히 혐오를 표출할 수 없다. 진짜 약자는 혐오의 대상이 된 개인과 집단이다. 그들은 약자라서 감히 혐오에 정면 대응하지도 못한다. 혐오자들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고 자신의 힘이 축소돼 가는 것에 대한 불안과 분노 때문이다. 새롭게 나타난 사람들과 주장이 길이 길이 보존하고 싶은 자신들의 세상에 딴지를 걸고 도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혐오자들 중 남자는 예전처럼 여자 위에 군림하면서 세상을 제 맘대로 할 수 없고, 청년세대는 인생의 황금시대인 청춘을 제 맘대로 즐기지 못하고 소처럼 일만 해야 하고, 이성애자는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결합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한국인들은 한국의 관습과 문화만을 고집할 수 없는 세상이 된 상황을 불안해하고 그것에 분노한다. 그리고 '짜증나는' 세상을 만든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자신이 그들보다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폭력은 항상 약자를 향한다. 폭력이 힘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힘 대 힘 대응?

혐오자들이 절대적 강자는 아니다. 그들도 누군가와 비교하면 약자다. 그들은 힘의 관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신보다 힘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감히 '대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혐오자들보다 더 큰 증오와 폭력의 힘으로 그들에게 대응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그래서 '찍소리'도 내지 못하게 누르면 되지 않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아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혐오의 문제가 개인과 집단의 불안과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근저에는 구조와 문화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구조와 문화를 바꾸지 않는한 혐오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 표출되고 지속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방식으로 대응하면 결국 또 다른 혐오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 뿐이다. 그러니 증오와 폭력의 힘으로는 혐오 전성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혐오라는 극단의 폭력이 사라지는 사회를 만들 수도 없다. 무엇보다 모두가 안전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힘 대 힘 대응이 아니면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이미 말한 것처럼 구조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지혜와 용기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물론이고 다양하게 존재하는 혐오는 우리사회의 현 상황에 대한 절망을 만든다. 그러나 희망은 절망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여론과 담론을 희망으로 변화시키고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공감과 연대를 만드는 것이다. 혐오 피해자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도 필요하고 혐오를 묵인, 또는 승인하는 사람들과의 공감과 연대도 만들어야 한다. 구조뿐만 아니라 문화도 바꿔야 혐오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조는 운동과 로비를 통해 법과 제도를 만들면 어느 정도 바뀌겠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문화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완벽해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실생활에서는 교묘한 방식의 혐오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성평등 교육을 해도 여전히 직장에서 여성 대상 성추행이 계속되고 법과 제도가 갖춰진 나라에서도 증오 범죄가 생기는 것과 같다.


문화를 바꿔야 남자들이 군대 안 가는 여자가 아닌 모든 남자를 군대로 보내는 징집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청년세대가 복지혜택을 누리는 노인이 아니라 청년과 노년이 모두 힘들게 살아야 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가 아니라 종교를 빌미로 동성애자 혐오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평범한 시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어야 같이 사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사실 혐오 전성시대가 이제야 시작됐으니 쉽게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만큼 변화의 시기는 앞당겨질 것이다. 다만 모든 것에 단기적으로 대응하고 재빠르게 이슈를 갈아타는 우리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혐오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오래 버틸지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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