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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이 사회적 약자인 나라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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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사건 폭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성차별과 성폭력이 만연해 있고 세상의 유행을 가장 먼저 따라가는 한국사회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Too) 캠페인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비로소 미투 캠페인이 한국에도 상륙한 것 같다. 사회 곳곳의 성차별적 구조와 문화가 견고한 상황에서 이 캠페인이 얼마나 힘을 발휘하고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그 사건이 검찰 조직 내에서, 다시 말해 성범죄를 조사하고 판단해야 하는 검찰 내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이 검찰 조직의 폭력적, 비윤리적 구조와 맞물려 교묘하게 은폐되고 왜곡됐다는 점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한국사회 최고 전문직 중 하나인 검사조차 '여자'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여자'의 모습을 갖게 되면 업무적 능력이나 조직 내 지위와는 상관 없이 성적인 희롱과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우리사회의 천박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사회 전체에 만연돼 있다는 점이다. 미투 캠페인에 동참해 공개된 다른 사건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들은 교수, 검사, 변호사, 승무원 등 전문직 여성들로 객관적 능력을 인정받아 조직에 합류하고 전문적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이상 성적 폭력을 비켜가기는 힘들었다. 이 사실이 많은 여성들을 절망과 분노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핵심 내용이다.


노골적인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지", "여자가 좀 꾸미고 다녀야지", "여자가 화장을 안 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야" 등등 여자를 남성의 욕구 충족의 도구로 취급하는 성희롱성 말들은 매일, 매순간 사회 곳곳을 떠돌면서 여성들을 공격한다. 매일, 매순간 이 사회의 수만, 수십만 여성들이 그런 말과 함께 행해지는 폭력 때문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심지어 죽음까지 생각한다.  


인구의 절반이 사회적 약자

지난 학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적 약자 집단을 적어보라고 했다. 놀랍게도 많은 학생들이 여성을 사회적 약자 집단으로 지목했다. 이유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희롱, 공격, 차별, 혐오의 대상이 돼 실제 피해를 입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안전하게 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5천만 명에 육박하는 우리사회 인구 중 절반이 여성이다. 2016년 인구조사를 보면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보다 9만 명 이상 많았다. 그런데도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 집단이다. 많은 숫자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작동하고 있는 남성 중심, 그리고 여성 차별 및 비하의 폭력적 구조와 문화다.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적 강자로 명명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이유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다름과 상호 인정이 아니라 힘의 관계로 해석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흔하고 매일 마주치는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지만 많은 남성들은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보다 힘이 없고 열등한 존재를 본다. 그런 남성들에게 여성은 힘으로 제압할 수 있고, 희롱할 수 있고, 공격할 수 있는 존재다. 나아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얼마든지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게 힘을 숭배하는 남성들은 사회 곳곳에서 힘에 의존하고, 힘을 강조하고, 힘의 악용을 정당화하는 폭력적 구조와 문화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 결과 인구 절반이 사회적 약자가 되고 다양한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끔찍한 사회가 됐다.


어떤 사람들은 남.녀 사이에 대결이 심해지고 적대감이 쌓여가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거나 나아가 위험한 사회 현상이라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공존의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런데 변화의 필요와 실질적 변화를 얘기하지 않고 그런 우려를 표하는 것은 부질 없고 무책임한 일이다. 상대적 약자의 필요와 변화의 욕구를 외면하고 공존을 언급하는 것은 비겁하고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결국 강자에게 편한 구조와 문화를 유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갈림길에 서 있다. 진정한 공존의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계속 상대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그들의 희생을 방치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지 말이다. 전자를 원한다면 누구도 침묵해서도 가만히 앉아 있어서도 안 된다. 모두가 대충 '착한' 여자나 남자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자기 주변의 폭력적 구조와 문화를 진단하고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럴 각오가 돼 있지 않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공감의 말 한 마디 보태는 것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인구의 절반이 사회적 약자인 사회에서 그것은 너무 비겁하고 위선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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