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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그들만의 리그

2017-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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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 1주년은 언제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부터 관련된 이런저런 기사와 글이 나오고 있다. 여러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때문에 그 의미를 현재의 상황에서 분석 및 재해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일이다. 특별히 많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진짜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비켜가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유감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교회를 개혁할 것이냐'다. 그리고 그 개혁 작업에 '누가 참여할 것이냐'다.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개혁을 얘기하고, 큰 방향을 제시하며, 운이 좋아 교단 총회나 다수의 목사들이 그것을 수용하면 개혁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아 개별 교회, 그리고 다수의 평신도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동의를 표시하면 되는 것인가?


사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여전히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그 의미를 정말 되새기고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지, 교회를 개혁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야 하는지에 크게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평신도가 열심히 생각해야 할 일로 교육받지도 독려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관심을 두면 스트레스만 받고 자괴감만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끼어주는 곳을 찾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데 이것이 사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가장 핵심 과제 중 하나다. 나는 종교개혁이 세계사에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가 '사제중심주의'와 '사제중보주의'에서의 탈피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적어도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사제가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관계를 맺고 말씀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렇게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참신하고 혁명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제는 특별한 직분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고 안내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제, 즉 목사와 신자들의 관계는 적어도 신 앞에서는 수평적이어야 하고 신앙생활 공동체인 교회의 조직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가 과연 이런 종교개혁의 핵심 내용을 따르고 있는지 의문이다. 목사들은 모르겠으나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은 절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

교회는 한 마디로 '그들만의 리그'가 작동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를 받은 목사들이다. 개교회에서 교단 총회까지 교회를 움직이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것은 목사들이다. 필요할 때는 신학자(절대 다수가 역시 목사들)들이 논리를 제공한다. '그들만의 리그', 다시 말해 '끼리끼리'의 구조와 정치가 가장 견고하게,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 자리잡은 곳이 바로 교회다. 내 얘기를 해보자.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아' 평신도인데도 교회기관의 회의에 참석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평신도' 신분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전공 때문이다. 이른바 전문위원 자격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그런 상황에 '고맙다'고 해야하나 착각이 들 정도다. 교단총회가 연합기관의 위원회에 사람을 보낼 때는 목사를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물론 교단총회도 거의 목사들로 구성된다. 가끔 장로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안수 받은 종신직책을 가진 장로는 사실 평신도가 아니다. 물론 교단은 평신도 인력 풀(pool)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단의 여신도회 총회들도 대부분 목사들이 리더 역할을 맡고 있고, 한때 평신도 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청년조직도 요즘엔 거의 젊은 목사들이 리더들이다.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됐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남는다. 이런 상황은 교회가 평신도 지도력을 키우는데 관심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결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아는 소위 '진보적' 교회 영역에서의 일이지만 소위 '보수적'이거나 '복음적''이라고 하는 교회가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현실은 교회가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그것을 벗어나보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까지 말이다.

 

그들만의 리그가 꼭 나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단언컨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 않고 현실적으로 문제를 양산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교회개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목사들의 학연, 지연, 줄세우기 등이 난무하는 곳이다. 교단 신학교는 많아야 몇 개 정도니 모두 선후배 관계고 그래서 후배가 선배에게 맞짱 뜨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라면 배짱 좋게 한 번 퍼붓고 전혀 다른 영역으로 가면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갈 곳을 찾기 힘들다. 물론 그것이 모두 비겁한 태도 때문이 아니라 많은 목사들이 가진 '온화하고' '수용적인' 성품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환경이 형성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끼리끼리' 구조와 정치는 소속 집단과의 공동운명을 강조하는 한국문화와 결합해 '제식구 감싸기' 같은 일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목사의 비리나 심지어 성폭행 같은 범죄행위도 서로 감싸주거나 은폐하는 일까지 생긴다. 만일 교회가 '그들만의 리그'를 깨는 노력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꾀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교회가 됐을 것이다. 적어도 종교개혁 500주년에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교회의 개혁과, 사회와의 관계 설정과 역할 등을 처음부터 다시 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평신도, 교회의 일개미?  

'그들만의 리그'가 견고하게 자리잡고 유지되는 이유는 평신도들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개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지만 교단의 구조는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평신도를 배제시킨다. 평신도에게는 교단총회의 결정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의무만 지워진다. 더 최악인 것은 의제나 결정사항의 대부분이 목사들과 관련된 일이고 때문에 평신도들과는 공유조차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는 목사와 평신도라는 두 개의 그룹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는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간극과 커다란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평신도는 목사 중심 교회 조직과 정치에서 중요한 견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지만 교회는 견제 집단을 조직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목사들은 여전히 평신도들을 종교교육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이 사회에 가면 당당히 제 역할을 다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을 겪으면서 목사들보다 더 풍부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도 경험을 통해 축적된 그들의 종교적 성찰은 존중되지도, 개교회와 교단 차원의 일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종교개혁의 '만인사제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교회의 구조와 정치에 모두가 같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물리적 환경만 바뀌었을뿐 이념과 구조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세계를 고수하고 있다. 평신도에게는 중세시대, 또는 그 이전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제에게 복종하고, 사제가 얘기하는 가르침을 따르고, 교회의 물리적 환경을 유지하고 돌볼 일개미의 역할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개교회와 교단의 일을 논의하고 결정할 권리와 권한은 여전히 극히 제한돼 있고 자유롭게 논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지금까지 접한 종교개혁과 관련된 토론, 대담, 글 등은 주로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이나 사회개혁에 교회가 어떻게 목소리를 낼 것이냐에 맞춰져 있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교회 내부 개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결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이 교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평신도들의 속 터지는 경험과 얘기를 알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관심 있는 것만 언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다. 그런데 솔직히 사회는 교회가 없어도 제대로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때문에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사회보다 분통 터지게 비상식적이고 뒤처져 있는 교회의 구조와 정치를 갈아 엎고, 그것을 통해 목사와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서 몸으로 평등한 관계와 민주적 절차를 경험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사회개혁에 기여하는 시민도 길러내는 길이다. 물론 교회 내부의 개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는 목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평신도와 함께 하는 조직적인 노력이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지적하는 것일 뿐이고, 좀 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실현가능성을 담보하지 않은 채 자기 선명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위안을 얻기 위한 비겁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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