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정의 실현은 보통 두 가지를 통해 이뤄진다. 하나는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절차를 통해서다.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특히 국가나 사회의 과거 잘못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렇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인 단죄와 처벌이 이뤄진다 해도 법적 절차의 정당성, 가해자의 참회, 피해자의 대응 등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인정 절차가 있어야 비로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전쟁 후 시도되는 정의 실현은 더욱 힘든 일이다. 이때 정의 실현의 대상이 되는 건 전쟁 범죄, 집단 살해, 반인륜 범죄 등이다. 내전의 경우 평화조약과 종전 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정의 실현 과정이 정부의 주도와 국민의 합의에 따라 실행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지 않고 그래서 국제사회와 협력해, 또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실행되곤 한다. 이런 정의 실현 과정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가해를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가해자가 참회하고 사과하는 경우 공식 사면 및 사적 용서 등을 통해 사회적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이런 정의 실현은 법적, 사회적 절차를 모두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국가 사이에 있은 가해와 피해를 다루는 정의 실현은 더욱 힘들다. 가해국이 잘못을 부인하고 정의 실현을 거부할 때 피해국과 국제사회 모두 가해국에 참회와 사과를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는 있으나 강요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인정, 참회,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고 우린 이런 어려운 정의 실현 문제를 수십 년 동안 다루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주목할만한 진척이 없으나 그럼에도 정의 실현의 원칙은 분명하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에 대한 규명과 가해 인정이 있어야 하고, 가해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참회와 사과, 그에 따른 태도와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잘못, 다시 말해 범죄의 규명과 참회 및 사과의 수준과 진정성 여부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용서 및 화해가 논의되고 시도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 내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과거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 그리고 개인의 대응과 관련해 새삼 논란이 일고 있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본이 과거에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음은 분명하고 거기에 대해 일본은 한 번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법적 절차에 따른 범죄의 규명이 있었으나 가해에 대한 처벌과 피해 배상이 제대로 이뤄진 적도 없다. 한마디로 정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으니 후속 조치인 새로운 관계의 형성, 용서 및 화해가 시도되지 않는다. 과거는 잊혀지지 않고 우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서 여전히 집단적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 진실 규명과 그에 합당한 처벌과 배상을 원하는 피해자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한국 정부가 대신 배상할테니 이제 일본의 가해는 잊고 편히 살라고 하는 건 폭력이고 국제사회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10여 년 전 만났던 일본 친구의 배우자가 의아하다면서 내게 질문을 했다. 그는 한국의 주장을 지지하는, 그리고 일본의 잘못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순수하게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한 건 36년에 불과하고 한반도 역사에서 보면 길지 않은데 왜 한국은 일본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으니 한국은 잊고 싶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최선의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그를 이해시키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니 계속 살아있는 역사로 그리고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의 보편적 상식은 국가나 집단의 범죄를 규명하고 기억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냉전 이후 많은 내전에서 있었던 전쟁 범죄, 대량 학살, 반인륜 범죄 등을 다뤄오고 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원칙은 그런 범죄를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범죄는 너무 오래됐으니 이젠 좀 잊어도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고 그들이 정의 실현을 원하는 데 잊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독일처럼 진심으로 참회와 사과를 하고 스스로 전범을 정리했다면 일본의 과거사는 정말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 부인하고 있으니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기억될 수밖에 없다. 사실 국제사회의 기류는 오래된 과거의 잘못을 잊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혹한 콩고 식민 지배에 대한 벨기에 국왕의 사과, 과거 노예무역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사과, 원주민에 대한 호주 정부의 사과, 미국 의원들의 원주민에 대한 정부 공식 사과 요청 등이 그렇다.
일본에 대한 범죄 인정과 사과 요구가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들에게도 정부가 대신 배상한다니 그냥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것이 국익을 위해서 할 일이라고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공식화하려면 ‘국익’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일본의 과거 범죄와 관련한 국익에 대한 합의가 없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국익은 ‘과거 잊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국익과는 다르다. 국익을 위해서라도 엄격하게, 그리고 원칙적으로 정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유는 가해에 대한 처벌과 피해에 대한 배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의 과거 잘못을 더는 거론하지 않고 봉합하는 선택을 한다면 이것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정의와 상식을 거스르는 것이고 국제적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한국의 결정은 또한 일본의 가해를 경험한 많은 아시아 국가와 개인의 정의 실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시민사회의 과거사 바로잡기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시민사회의 노력도 방해하게 된다. 지난 4월 11일 한.일 시민사회는 일본의 사도광산에서 있었던 한국인 강제 동원과 노동, 그리고 반인륜적 폭력과 착취에 대한 보고서와 의견서를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자문기관에 보냈다. 일본 시민사회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가해국 사회에 사는 그들에게도 과거 규명과 정의 실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한국을 존중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떨어뜨리고 국익을 해치는 것이 된다.
국익을 위해서도 과거는 엄격하게 다루고 정의 실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일시적인 관계 경색 있더라도 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노력과 요구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정부가,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피해자들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위안이자 연대다. 과거 잘못을 부인하고 적반하장으로 양보만 요구하는 일본에게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정의에 기반해 계속 압력을 넣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정의 실현은 보통 두 가지를 통해 이뤄진다. 하나는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절차를 통해서다.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특히 국가나 사회의 과거 잘못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렇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인 단죄와 처벌이 이뤄진다 해도 법적 절차의 정당성, 가해자의 참회, 피해자의 대응 등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인정 절차가 있어야 비로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전쟁 후 시도되는 정의 실현은 더욱 힘든 일이다. 이때 정의 실현의 대상이 되는 건 전쟁 범죄, 집단 살해, 반인륜 범죄 등이다. 내전의 경우 평화조약과 종전 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정의 실현 과정이 정부의 주도와 국민의 합의에 따라 실행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지 않고 그래서 국제사회와 협력해, 또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실행되곤 한다. 이런 정의 실현 과정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가해를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가해자가 참회하고 사과하는 경우 공식 사면 및 사적 용서 등을 통해 사회적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이런 정의 실현은 법적, 사회적 절차를 모두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국가 사이에 있은 가해와 피해를 다루는 정의 실현은 더욱 힘들다. 가해국이 잘못을 부인하고 정의 실현을 거부할 때 피해국과 국제사회 모두 가해국에 참회와 사과를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는 있으나 강요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인정, 참회,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고 우린 이런 어려운 정의 실현 문제를 수십 년 동안 다루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주목할만한 진척이 없으나 그럼에도 정의 실현의 원칙은 분명하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에 대한 규명과 가해 인정이 있어야 하고, 가해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참회와 사과, 그에 따른 태도와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잘못, 다시 말해 범죄의 규명과 참회 및 사과의 수준과 진정성 여부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용서 및 화해가 논의되고 시도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 내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일본의 과거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 그리고 개인의 대응과 관련해 새삼 논란이 일고 있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본이 과거에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음은 분명하고 거기에 대해 일본은 한 번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법적 절차에 따른 범죄의 규명이 있었으나 가해에 대한 처벌과 피해 배상이 제대로 이뤄진 적도 없다. 한마디로 정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으니 후속 조치인 새로운 관계의 형성, 용서 및 화해가 시도되지 않는다. 과거는 잊혀지지 않고 우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서 여전히 집단적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 진실 규명과 그에 합당한 처벌과 배상을 원하는 피해자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한국 정부가 대신 배상할테니 이제 일본의 가해는 잊고 편히 살라고 하는 건 폭력이고 국제사회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10여 년 전 만났던 일본 친구의 배우자가 의아하다면서 내게 질문을 했다. 그는 한국의 주장을 지지하는, 그리고 일본의 잘못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순수하게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한 건 36년에 불과하고 한반도 역사에서 보면 길지 않은데 왜 한국은 일본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으니 한국은 잊고 싶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최선의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그를 이해시키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니 계속 살아있는 역사로 그리고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의 보편적 상식은 국가나 집단의 범죄를 규명하고 기억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냉전 이후 많은 내전에서 있었던 전쟁 범죄, 대량 학살, 반인륜 범죄 등을 다뤄오고 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원칙은 그런 범죄를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범죄는 너무 오래됐으니 이젠 좀 잊어도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고 그들이 정의 실현을 원하는 데 잊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독일처럼 진심으로 참회와 사과를 하고 스스로 전범을 정리했다면 일본의 과거사는 정말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 부인하고 있으니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기억될 수밖에 없다. 사실 국제사회의 기류는 오래된 과거의 잘못을 잊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혹한 콩고 식민 지배에 대한 벨기에 국왕의 사과, 과거 노예무역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사과, 원주민에 대한 호주 정부의 사과, 미국 의원들의 원주민에 대한 정부 공식 사과 요청 등이 그렇다.
일본에 대한 범죄 인정과 사과 요구가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들에게도 정부가 대신 배상한다니 그냥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것이 국익을 위해서 할 일이라고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공식화하려면 ‘국익’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일본의 과거 범죄와 관련한 국익에 대한 합의가 없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국익은 ‘과거 잊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국익과는 다르다. 국익을 위해서라도 엄격하게, 그리고 원칙적으로 정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유는 가해에 대한 처벌과 피해에 대한 배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의 과거 잘못을 더는 거론하지 않고 봉합하는 선택을 한다면 이것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정의와 상식을 거스르는 것이고 국제적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한국의 결정은 또한 일본의 가해를 경험한 많은 아시아 국가와 개인의 정의 실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시민사회의 과거사 바로잡기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시민사회의 노력도 방해하게 된다. 지난 4월 11일 한.일 시민사회는 일본의 사도광산에서 있었던 한국인 강제 동원과 노동, 그리고 반인륜적 폭력과 착취에 대한 보고서와 의견서를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자문기관에 보냈다. 일본 시민사회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가해국 사회에 사는 그들에게도 과거 규명과 정의 실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한국을 존중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떨어뜨리고 국익을 해치는 것이 된다.
국익을 위해서도 과거는 엄격하게 다루고 정의 실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일시적인 관계 경색 있더라도 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노력과 요구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정부가,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피해자들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위안이자 연대다. 과거 잘못을 부인하고 적반하장으로 양보만 요구하는 일본에게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정의에 기반해 계속 압력을 넣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